[곽인찬 칼럼]

어슬렁대는 한국판 적기법

원조 英선 깃발 찢으며 반성
한국선 타다금지법 만지작
혁신성장은 립서비스 그쳐

지난달 3일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 400대가 넘는 고물차가 모였다. 이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경주대회가 열렸다. 올해로 123년째다. 이름하여 '런던-브라이튼 베테랑 카 런'이다. 런던에서 87㎞ 떨어진 해안도시 브라이튼까지 달리는 대회다. 참가 조건이 까다롭다. 1905년 이전에 만들어진 차만 참가할 수 있다. 평균시속은 32㎞로 제한된다.

시합 전에 꼭 붉은 깃발을 찢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찢었다. 1896년 영국 의회는 붉은깃발법(적기법)을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기념하는 의식이다. 악명 높은 적기법은 1865년에 만들어졌다. 차 한 대에 기사 셋을 두라, 한 명은 차 앞에서 붉은깃발을 흔들라, 속도는 도심에서 시속 3.2㎞, 교외에서 6.4㎞를 넘지 말라는 게 핵심이다. 이 법을 없애는 데 딱 한 세대가 걸렸다. 자동차 팬들은 환호했다. 자축하는 뜻에서 '해방 경주대회'를 열었다. 이때 보수당 소속 윈첼시 경이 상징적으로 붉은 깃발을 찢었다. 이 전통이 100년 넘게 이어지는 중이다.

19세기 중반 대영제국은 전성기를 누렸다.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 아래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됐다. 학문도 활짝 꽃을 피웠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1859년)을 써서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같은 해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했다. 회사법(1862년)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틀을 닦았다.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적기법이 나왔을까.

150년 전으로 시계추를 돌리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마차만 달리던 길에 어느날 갑자기 육중한 자동차가 나타났다. 차가 지나간 길은 움푹 파였다. 무엇보다 사람을 칠까봐 걱정이 컸다. 시대를 막론하고 시민의 안전은 최상급 가치다. 여기에 기득권자인 마차와 철도 업자들이 세게 로비했다. 기존 산업을 보호할 명분은 차고넘쳤다. 당시 자유당 정부는 자동차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다.

남 흉볼 때가 아니다.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진행 중이다. 국회는 '타다' 영업을 원천봉쇄하는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을 논의 중이다. 모빌리티 혁신을 꿈꾸던 이재웅 쏘카 대표는 2일 재판정에 섰다. 검찰은 그를 현행법 위반으로 걸었다. 혁신을 주도한 게 죄라니, 우린 적기법을 조롱할 자격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말할 때 플루트를 예로 든다. 가장 좋은 플루트는 누구한테 줘야 하나. 힘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 지금 플루트를 불고 있는 사람? 아니다. 플루트를 가장 잘 부는 사람이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더 멋진 플루트 연주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빌리티 산업에선 손님이 원하는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왕이다.

타다금지법을 발의한 박홍근 의원(더불어민주당)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들을 감싸안으려는 박 의원의 태도는 오히려 인간적이다. 그에 비하면 톡톡 쏘는 이재웅 쏘카 대표의 직설화법은 너무 뾰족하다. 그러나 어쩌랴, 시장은 인간성보다 효율성이 지배하는 곳이다.

문재인 대통령에 당부한다. 혁신을 위해 한번 더 나서달라. 문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적기법을 거론하며 인터넷은행 특례법 제정을 주도했다.
사실 적기법은 모빌리티 혁신을 촉진할 때 더 어울리는 소재다. 모빌리티 혁신 특례법이 필요하다. 배배 꼬인 타다 실타래를 대통령이 풀어주길 바란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