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스트리트]

필리버스터

20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패스트트랙에 올린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과 공수처법 처리를 강행하려 하자 자유한국당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카드를 빼들면서다. 이로 인해 민생법안 등 법사위를 통과한 일반안건들 모두 통과시점을 기약할 수 없게 됐다.

유럽이 해양 패권을 쥐었던 15~17세기 '사략선'(私掠船·privateer ship)이 등장했다. 국가로부터 특허장을 받은 개인이 다른 나라 상선을 노략질하도록 허용하는 무장 선박이었다. 말하자면 허가받은 해적선이라고나 할까. 필리버스터란 말도 이 '사략 해적'을 가리키는 네덜란드어에서 기원한다.

필리버스터 제도는 소수당이 다수당의 독주를 막으려는 취지로 도입됐다. 어원에서 풍기는 뉘앙스처럼 그 방식이 늘 신사적으로 비치진 않는다. 표결을 막기 위해 투표함까지 굼벵이 걸음을 허용하는 나라도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제헌의회 때 무제한 토론만 가능한 방식의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했다. 1964년 김대중 의원이 동료 의원 구속동의안을 막으려 5시간19분간 발언을 이어간 기록을 세웠다. 이에 비해 미국 상원은 의제와 상관없이 소설이나 전화번호부를 읽는 것도 허용된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3일 "오늘 저녁까지 필리버스터를 철회하라"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여차하면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기 위해 3일짜리 임시국회를 여러 번 열어 쟁점법안을 한 건씩 처리하려는 낌새다. 필리버스터를 한 법안은 다음 본회의에서 바로 표결할 수 있어서다. 그러나 공수처법과 선거법에 대해 바른미래당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 이 편법이 순항할지도 미지수다.
더욱이 국회는 한때 폐지했던 필리버스터를 2012년 국회선진화법으로 되살렸다. 제도 자체는 '선진적 대의정치'의 수단으로 본 셈이다. 그렇다면 여야가 원포인트 본회의를 열어 이미 합의한 민생법안을 먼저 처리하고 이후에 패스트트랙 법안을 놓고 막판 타협을 시도하든지, 다시 싸우든지 하는 게 온당하다고 본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