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염주영 칼럼]한은, 디플레 파이터가 되라

염주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2.09 17:48

수정 2019.12.09 17:48

저물가에 소비부진 양상 뚜렷
GDP 물가는 4분기 연속 하락
일본형 장기불황 서막일 수도
[염주영 칼럼]한은, 디플레 파이터가 되라
물가가 오르면 다행이라고 말하는 시대가 됐다. 11월 소비자물가가 그렇다. 통계청은 지난주 11월 소비자물가가 전년동기 대비 0.2% 올랐다고 발표했다.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 0.2%는 사실상 올랐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미미한 수치다. 그럼에도 다행이란 말이 나온다. 이전 3개월간(8~10월) 마이너스권(-0.4~0%)에 머물렀던 것에 비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1970~1980년대 고도성장기에는 물가가 가파르게 치솟았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0%를 넘은 해가 비일비재했다. 정부가 내년도 경제운용계획을 짤 때마다 물가안정은 단골 메뉴였다. 특히 통화가치 안정이 사명인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때의 물가안정은 물가상승률을 최대한 낮추는 것을 의미했다.

요즘에도 물가안정이 한은 통화정책의 최대 목표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물가안정의 속뜻은 달라졌다. 이제는 물가상승률을 최대한 높이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는 고물가가 경제안정을 위협했지만 지금은 저물가가 경제안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협의 정도를 따지자면 저물가가 고물가보다 몇 배 더 위험하다. 경제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돼서 장기침체를 피할 수 없게 되는데 이를 디플레라고 한다.

디플레의 대표적 전조 증상 중 하나가 물가하락이다. 물가는 소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물가가 오르면 소비자는 소비를 적극적으로 한다. 구입 시기를 늦출수록 값이 올라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가가 떨어질 때는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수중에 돈이 있어도 가급적이면 소비를 하려 하지 않는다. 구입 시기를 늦출수록 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물가하락 기대심리가 소비를 억제해 극심한 소비부진을 초래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소비감소→투자감소→고용감소→성장률 추락' 과정을 되풀이한다. 출구 없는 축소재생산으로 경제는 한없이 쪼그라들게 된다. 디플레를 대재앙에 비유하는 이유는 이런 특성 때문이다.

그 전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20년 동안(1990년대초~2010년대초) 연평균 소비자물가가 0%대, GDP물가(GDP디플레이터)는 마이너스 1%대를 보였다. 지금 우리 경제가 딱 이런 모습이다. 지난 3·4분기에 소비자물가는 전년동기 대비 0.2% 올랐고, GDP물가는 마이너스 1.6%를 기록했다. 특히 GDP물가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4·4분기부터 네 분기 연속 하락했으며, 3·4분기 하락폭은 외환위기 이후 20년 만에 최대다. 이 정도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추세로 봐야 한다. 정부와 한은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경제가 디플레 단계는 아니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디플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다가와 있을 개연성이 높다.

우리 경제가 디플레 진입 직전이거나 이미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S&P 관계자는 지난주 어느 세미나에서 내년 한국 경제의 핵심 리스크로 디플레를 꼽았다. 그러면서 "중앙은행이 금리인하 이외에 다른 정책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며 한은의 역할을 강조했다. 다른 정책수단이란 양적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은이 내년에 디플레 파이터가 돼야 한다. 설혹 우리 경제가 디플레가 아니더라도 그로 인한 부작용은 대책 없이 디플레를 맞는 위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신중은 우유부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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