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정순민 칼럼]누가 ‘경제 망명’을 부추기나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2.11 17:37

수정 2019.12.11 17:37

규제의 대명사 英 적기법
21세기 한국서 부활 조짐
혁신 없인 미래 보장못해
[정순민 칼럼]누가 ‘경제 망명’을 부추기나
요즘 가장 핫한 이슈의 하나는 '붉은 깃발법'이다. 렌터카 기반의 차량호출 서비스 '타다'를 기획한 이재웅 쏘카 대표가 "(사실상 타다를 금지한) 여객운수사업법 개정안은 150여년 전 영국의 붉은깃발법과 다를 것이 없다"고 반발하면서다. 이 대표는 "해외토픽감이다" "할 말을 잃었다" "지금이 2019년이 맞기는 하냐"며 연일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만약 이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 타다는 당장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사실 이 법이 처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건 지난해 여름이다. 작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이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한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약속하면서 적기법(赤旗法), 즉 붉은깃발법 이야기를 꺼냈다.
법과 제도가 산업을 망친 대표적 사례로 이 법을 언급하면서, 적어도 우리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 법 때문에 결국 영국은 자동차산업에서 독일과 미국에 뒤처졌다"며 "혁신성장을 위한 규제혁신은 속도와 타이밍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영국 의회가 이 법을 처음 제정한 건 1861년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다. 시작은 선의(善意)였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증기자동차가 잦은 사고로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자 이를 방지하기 위한 법안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렇게 해서 차량의 무게는 12톤, 최고속도는 시속 16㎞(시가지에선 시속 8㎞)로 제한하는 '기관차량 조례(Locomotive Act)'가 만들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예의 붉은 깃발은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4년 뒤인 1865년 이 법이 개정되면서 사달이 났다. 1대의 차량에는 운전사, 기관원, 기수 등 3명의 인원이 필요하고 그중 기수는 반드시 붉은 깃발을 들고 자동차를 선도해야 한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또 최고속도는 시속 16㎞에서 6.4㎞(시가지에선 시속 3.2㎞)로 대폭 줄어들고, 말과 마주친 자동차는 일단 정지해야 한다는 새로운 규제도 생겨났다. 명백한 개악이다. 신기술(자동차)의 등장이 달갑지만은 않았던 마차업자들이 영국 의회를 강하게 압박한 결과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혁명이 아니라 규제혁명'이라는 말이 있다. 제아무리 좋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더라도 법과 제도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어서다. 영국이 붉은깃발법을 제정할 당시 자동차는 최고시속 30㎞ 이상으로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마차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이를 시속 3.2㎞까지 제한하면서 자동차가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없게 했다. 이러니 누가 영국에서 좋은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했겠나. 증기엔진을 가장 먼저 개발한 '산업혁명의 나라' 영국이 자동차 강국 타이틀을 이웃나라에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주위를 둘러보면 대한민국 곳곳에서도 붉은 깃발이 나부낀다. 적폐는 정치권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각종 규제로 사업을 접은 사례는 차고 넘친다. 심야시간대 버스 중개서비스를 하던 '콜버스'는 택시업계의 반발로 문을 닫았고, 농어촌 빈집 공유 비즈니스를 준비하던 '다자요'는 농어촌민박업 규제에 걸려 사업이 지지부진한 상태다. 그러다 보니 해외로 나가 꿈을 펼치는 '경제적 망명자'도 나온다.
싱가포르 등 동남아 국가에서 타다와 똑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 엠블랩스의 또 다른 타다가 그런 경우다. 국내와 달리 동남아 타다는 별문제 없이 사업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는 사실이 얄궂다.
붉은 깃발 아래 신음하는 기업가가 있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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