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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유럽식 사죄

박종원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2.27 08:42

수정 2019.12.27 08:42

지난 21일(현지시간)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에서 촬영된 전통 가면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사진이 들어간 프랑스 국기가 꼿혀 있다.로이터뉴스1
지난 21일(현지시간)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에서 촬영된 전통 가면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사진이 들어간 프랑스 국기가 꼿혀 있다.로이터뉴스1


[파이낸셜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21일(현지시간) 옛 프랑스 식민지였던 코트디부아르에서 "프랑스의 식민주의는 중대한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사흘 뒤 터키 국영 아나돌루통신은 프랑스가 1524년 이후 300년 이상, 아프리카의 35%를 식민지배했다며 그 만행이 "중대한 잘못"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프랑스가 진정으로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를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잘못을 "인정"하긴 했지만 식민지배 자체를 사죄하거나 책임지고 배상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식민지 과거사에 대한 유럽의 모호한 태도는 프랑스뿐만이 아니다. 유럽연합(EU)은 지난 2001년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렸던 제1회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에 참여해 역사상 처음으로 식민주의가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 등을 유발했고 아프리카 및 아시아인들이 식민주의에 희생당했다고 인정했으나 사죄와 배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세계대전을 2번 일으키고 주변 유럽 이웃들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왔던 독일도 더반 회의에서 아프리카 식민지배의 잘못을 처음 시인했지만 사죄나 배상같은 단어는 쓰지 않았다. 당시 요시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희생자나 후손들이 빼앗겼던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의미가 있다"는 어정쩡한 담화를 냈다.

유럽이 이처럼 사과에 인색한 이유는 책임과 배상을 인정할 경우 내놓아야 할 돈이 천문학적인 규모이기 때문이다. 유럽 열강이 식민지 개척에 나선 기간은 짧게 잡아도 400년 이상이며 관련 희생자들이 줄지어 소송을 제기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기간 동안 법정 다툼을 벌여야 한다. EU가 더반 회의에서 식민지배 관련 잘못을 인정한 것도 옛 피지배 국가들이 배상을 요구하지 않기로 미리 합의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정부는 지난 3월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이 500년 전 중남미 정복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를 요구하자 단칼에 거절했다. 스페인 측은 "당시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에 도착했던 사건은 지금 시대의 이해에 따라 판단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유럽 내에는 아직도 자신들이 식민지배로 미개 지역에 문명을 전파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2017년 대선 운동 당시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를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불렀던 마크롱은 해당 발언 직후 국내 우파 세력의 비난이 빗발치자 같은달 연설에서 "불쾌하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해명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유럽과 유럽의 옛 식민지 국가들은 식민지배 자체보다는 개별 사건에 집중하고 있다. 영국은 지난 2013년 2월에 인도 암리차르 학살 사건을 놓고 처음으로 "유감"을 표했고 같은해 케냐 마우마우 봉기 무력 진압에 대해 역대 최초로 사과와 배상을 약속했다. 독일은 2015년에 들어서야 나미비아 헤레로 학살을 인정하고 배상 절차를 시작했다. 132년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지난달 프랑스가 식민지배 시절 전반에 걸쳐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국제기구를 찾아가 제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다만 유럽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벨기에는 아프리카 식민통치를 사과하라는 유엔 보고서가 나온 지 2개월이 지난 올해 4월, 처음으로 포괄적인 사과문을 내놨다.
당시 샤를 미셸 벨기에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 벨기에가 지배했던 아프리카 중부에서 혼혈 분리 및 납치 정책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연방정부의 이름으로 벨기에 식민통치 시대의 혼혈인과 가족들에게 행했던 부당한 조치와 그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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