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껌으로 시작한 유통 대부, 실패도 경험이었다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별세]

김성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1.19 18:18

수정 2020.01.19 20:55

일제강점기, 父반대 딛고 일본행
우유 배달하며 야간부 학업 동행
첫 사업 실패에도 특수화학 올인
결국 껌 성공하며 유통신화 시작
국가 위기땐 민간외교관 자처도
신격호 명예회장 젊은 시절
신격호 명예회장 젊은 시절
롯데제과 공장을 순시하는 신격호 명예회장(연도 미상)
롯데제과 공장을 순시하는 신격호 명예회장(연도 미상)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맨주먹으로 굴지 대기업을 일군 마지막 한국 1세대 기업인이다.

또한 신 명예회장은 낭만과 열정이 가득한 경영인이었다. 특히 그는 문학을 사랑한 기업인이었다. 사명인 '롯데'를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따온 사실은 유명하다.

신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인 음력 1921년(주민등록상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주 삼동면 둔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빈농인 신진수씨로, 5남5녀 중 장남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가정형편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고, 우여곡절 끝에 큰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입학했다. 1938년 학교를 마치고 경남도립종축장 기수보(技手補)로 취업했지만 박봉에 미래도 확실치 않았다.

소년기를 일제 치하에서 보낸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일본으로 몰래 건너갔다. 1941년 봄이었다. 집안의 허락을 받지 못한 가출이었다. 그해 12월 미국이 전쟁에 본격 참전해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격변의 시기였다.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노순화씨와 결혼해 어린 딸 신영자를 둔 가장이었지만 기회를 찾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일본인 경찰서장도 조언을 줬다. 서장은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듣자 격려하며 허가를 내줬다고 했다.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지만 더 큰 세계로 나가겠다는 신 명예회장의 각오를 꺾지 못했다.

수중에 쥔 돈은 120엔이 전부였다. 말단 공무원 2개월치 월급이었다. 도쿄에서 자취를 하며 우유 배달일을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남달리 부지런한 그는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고, 소문이 나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공부에 열의가 대단했던 그는 번 돈을 모아 와세다실업학교 고등부 야간부 화공과에 등록하고 학업을 이어갔다. 이공계를 선택한 건 일본이 이공계 학생을 징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공인 화학은 미래 때문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화학을 선택한 이유로 "나라가 발전하면 화학도 발전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첫 사업 실패로 무너진 그를 일으켜 세운 건 특수화학 연구였다. 그 결과물은 껌이었다.

1944년 첫 회사를 창업한 건 특유의 근면함 덕분이었다. 가까이서 그의 사람됨을 지켜본 하나미쓰(花光)라는 자산가가 거금 5만엔을 빌려주며 공장을 운영해보라고 권했던 것이다. 공장에 미군의 폭격이 떨어져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으나 큰 경험이 됐다.

신격호 명예회장(오른쪽)이 한·일국교 정상화가 맺어진 지난 1965년 6월 직후에 김포공항에 수행원 2명과 함께 첫 발을 내딛고 있다.
신격호 명예회장(오른쪽)이 한·일국교 정상화가 맺어진 지난 1965년 6월 직후에 김포공항에 수행원 2명과 함께 첫 발을 내딛고 있다.
1991년 5월 4일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개점 기념식에 참석한 신격호 명예회장 내외와 신동빈 회장
1991년 5월 4일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개점 기념식에 참석한 신격호 명예회장 내외와 신동빈 회장

신 명예회장은 고향과 모국에 대한 애정도 컸다. 건강이 악화되기 전인 2013년까지 매년 5월 고향인 울주군 둔기리 마을잔치를 열었다. 1970년 대암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된 이후 신 회장이 마을 이름을 딴 둔기회를 만들고 해마다 마을잔치를 열도록 한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 이후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안을 받고 한국에서 본격적인 사업도 시작했다. 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에 넓게 퍼진 사업체를 성실하게 돌봤다. 일본에서 쌓은 인맥으로 민간외교관 역할도 톡톡히 했다. 정통한 한 인사는 신 회장이 한국 정부보다 일본에서 영향력이 큰 시기도 있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그 덕분에 일본을 찾는 한국 정·관계 인사가 신 회장을 먼저 찾아 도움을 구하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다만 형제들과의 관계로 마음고생을 했다. 1960년대 라면사업에 뛰어든 동생 신춘호를 격하게 반대하며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
롯데라면이 성공을 거둔 뒤 신춘호 회장은 독립해 농심으로 사명을 바꿨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된 1996년엔 차명부동산 명의자였던 동생 신준호와도 건물 소유권을 놓고 소송전을 벌였다.
패소한 신준호 푸르밀 회장은 롯데우유를 가지고 독립해 푸르밀로 사명을 바꿨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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