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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히치하이킹 히치콕!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2.03 17:50

수정 2020.02.03 17:50

[fn논단] 히치하이킹 히치콕!
지난 칼럼 '히치하이킹 2020!'에서 예고했듯이 구보 PD는 한 달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옆자리에 올라타고 달렸다. 히치콕 영화 수십편을 다시 봤고 1000페이지 히치콕 전기도 읽었다. '사이코' '현기증' '이창' '오명' '새' '레베카' 이들은 그의 대표작이며 할리우드의 대표작이고 현대영화의 대표작들이다.

사람들은 히치콕 감독을 도망자 영화 공식의 완성자니 스릴러의 대가라 칭하지만 그는 영화계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다. 그는 1899년 런던 청과상집 아들로 태어나 평생 5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40세 되던 1939년 할리우드로 스카우트되어 가지만 마음고생이 많았고 당대의 미국 평단에선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를 최고의 감독으로 등극시킨 사람은 프랑스 영화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다. 그는 히치콕의 위대함에 반해 존경의 편지를 쓰고 쓴 끝에 히치하이킹에 성공한다. 일주일간의 인터뷰! 1966년 출간된 책은 세상의 모든 영화감독과 드라마감독들의 바이블이 되었고 그는 최고 예술가로 헌액된다.

인터뷰에서 히치콕은 말했다. 관객은 오르간이고 자신은 연주자다. 구보씨는 그의 작품에서 관객을 오르간처럼 연주하는 히치콕을 발견한다. 그는 교묘한 전략과 전술로 관객을 공략하다가 'The End' 자막을 올리며 시저 황제처럼 외친다.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사이코'와 '현기증'에서, '새' '이창' '북북서로 기수를 돌려라' 등 모든 작품에서 그러했다.

히치콕은 스토리의 3대 요소인 '인물'과 '사건'은 물론이고 '배경'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연출한 작가다. 그는 망망대해에 표류한 보트 한조각 위에서 영화 한편을 만들어냈고('구명보트'), 아파트 거실 하나에서 한편의 영화를 생산해냈다('로프').

그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명소들을 자신의 영화 속에 펼쳤다. 뉴욕항 맞은편에 우뚝 선 자유의 여신상. '파괴공작원'의 93m 여신상 꼭대기에서 벌어지는 엔딩 추격신은 불가사의다. '현기증'은 우리를 2500년 된 세쿼이아나무 숲으로 데려가고, '북북서'에서는 미국 대통령 네 사람의 얼굴을 조각한 러시모어 산을 타고 오른다.

히치콕은 자신의 영화 속에 얼떨떨한 엑스트라 출연으로 유명하다. 그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지 못했다. 단지 공로상을 받았을 뿐. 그는 1968년 트로피를 들고 세계 영화인들을 향해 멋진 연설을 한다. "생큐" 단 한마디! 감독은 별세 4년 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다. 기자가 너무 늦게 받은 게 아니냐고 묻자 답한다. "여왕께서 깜빡 하셨겠죠."

구보씨는 한달간의 히치하이킹 후 독창적 결론에 도달했다. "여러분, 히치 선생도 누군가의 차에 분명 히치하이킹을 했습니다. 그는 손자병법 쓴 손자 선생의 수레에 틀림없이 탔었습니다.
"

그의 작품 속에는 지피지기 백전불태부터 성동격서(聲東擊西) 무중생유(無中生有) 암도진창(暗渡陳倉) 소리장도(笑裏藏刀), 관객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온갖 손자병법의 책략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는 원리의 고수였다.


구보. 히치콕 차에서 내리며 중얼거린다. "에이, 너무 늦게 탔어."

독자제위께 고하니, 세상 각 분야마다 원리고수(原理高手) 히치콕이 계실테니 부디 늦게 타지 마시라.

이응진 경기대 한국드라마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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