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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틀딱들을 위하여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6.01 18:42

수정 2020.06.01 18:42

[fn논단] 틀딱들을 위하여
세상 온통 싸움질이다. 성별싸움. 세대싸움. 구보 PD가 필리핀 여행 가서 본 닭싸움 같다. 다리에 면도날을 찬 닭들이 서로를 향해 죽일 듯 치솟아 오른다. 며칠 전 그런 풍경을 마주쳤다. 혼자 사는 장모님의 목욕탕 파이프가 고장 났다. 구보씨는 기계충이다.
마누라는 구보씨에게 따라만 다니라고 했다. 아파트 근처 전파상에 들러 수도파이프를 사더니 관리실로 전화를 한다.

얼마 후 장닭처럼 생긴 젊은 사내가 나타났다. 주말엔 이런 일 안한다고 투덜거린다. 마누라 급굽실에 사내는 목욕탕에서 망치질 몽키질 몇 번 하더니 소리친다. 모델을 잘못 사오셨어요! 마누라 왈, 전파상 영감님이 이 주위 아파트에 모두 잘 맞는 형이라던데요. 보세요, 벽에 안 붙잖습니까. 그럼 불량품입니다! 바꾸거나 다른 모델로 가져와 연락주세요. 화가 난 마누라가 금방 산 수도파이프를 들고 달려나간다. 구보씨도 쫄랑쫄랑 따를 수밖에.

불량이라뇨? 벽에 안 붙던데요. 다른 모델로 바꿔주세요. 이 지역 아파트는 제가 압니다. 기술이 불량이지. 왜 제품 탓을 한답니까! 개코도 모르는 젊은 놈들이 제품 탓, 연장 탓만 한다니까요. 보아하니 한두번이 아닌 듯하다. 영감님은 갑자기 살아온 경력을 줄줄 읊기 시작한다. 자신은 중동 건설현장에서 온갖 욕 다 먹어가며 기술 배웠다. 요즘 놈들은 늙은이 틀딱이라 무시하고 배울 생각 않는 놈들, 빌어먹기도 아까운 놈들이다. 틀딱영감, 주변 아파트 관리실 젊은이들을 싸잡아 비난하다가 직접 나설 듯 공구를 챙기러 간다. 마누라는 구보씨를 노려보며 '당신하고 딱 닮았네' 한다.

구경꾼들 지켜보는 가운데, 목욕탕에서 틀딱영감이 신경질적으로 몽키질 망치질을 한다. 잠시 뒤, 아주머니, 보세요. 영감이 샤워기를 휙 트니 물이 분수처럼 쏴아 솟구친다. 이래도 불량품입니까? 관리실 장닭 편든 마누라를 향해 내지른다. 그때부터 다시 틀딱의 넋두리가 시작된다. 빌어먹기도 아까운 놈들, 빌붙어서 월급만 축내는 놈들! 지 실력을 탓하지 왜 남의 제품을 탓한답니까.

틀딱 한판승에 신이 난 구보씨 옆을 보니 장닭이 언제 왔는지 다 듣고 있었다. 눈치 챈 영감이 들어라 하곤 했던 말을 되풀이한다. 개코도 모르는 놈들. 빌붙어서 월급만 축내는 놈들! 큰 싸움 나게 생겼구나 싶은데. 뭐라구요. 영감님! 영감이고 땡감이고, 자! 눈깔로 보라, 불량품? 아니 눈깔이라뇨? 그럼 눈깔이 아니고?

두 사람이 필리핀 싸움닭처럼 서로를 향해 솟구치려는 순간, 에-구-구- 장모 울부짖는 바람에 장닭이 휙 돌아 나가버렸다. 틀딱영감. 또 넋두리를 내뱉는다. 구보씨, 얼른 지갑에서 5만원을 꺼내 마누라에게 눈을 껌벅였다. 싸움구경 값!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보씨는 휘파람을 불었다. 웬 신바람이야? 오늘 얘긴 아들놈에게 꼭 해야겠어. 뭘? 그놈이 지 애비 경험 타령 무시한 적이 한두번이요? 쌍놈!

다음 날 강의 가는 전철 안, 구보씨는 옛날 사놓았던 카프카의 소설 '아메리카' 첫 장을 열었다. 첫 에피소드가 '스토커'다.
와, 1900년 초에 스토커? 구보씨는 틀딱애비가 공부도 한다는 걸 과시하려 아들놈에게 카톡을 보냈다. "카프카가 100년 전 소설에 '스토커'라는 단어를 썼네!" 즉답이 왔다.
"잘 살펴봐, 그 스토커는 기계 다루는 사람 Stoker, 아빠가 말하는 스토커는 Stalker."

틀딱도 틀딱 나름. 구보씨는 이곳저곳 독서 중인 장닭들을 쳐다보며 입을 쩝쩝거렸다.

이응진 경기대 한국드라마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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