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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위태롭고 멘토도 잃었지만 나는 괜찮다, 그분의 섭리를 믿기에… [Guideposts]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0.20 17:54

수정 2020.12.24 10:47

매출 5000만弗 제재소의 사장이자
풋볼 코치로 다큐 영화까지 출연하며
승승장구하던 인생에
美-中 무역전쟁과 팬데믹 연이은 시련
의지하던 목사마저 코로나로 세상 떠나
일상은 힘겹고 여전히 혼란 속에 있지만
내 삶과 가족, 미래, 슬픔도
살아계신 그분을 믿고 의탁할 뿐…
사업 위태롭고 멘토도 잃었지만 나는 괜찮다, 그분의 섭리를 믿기에… [Guideposts]
생전의 팀 러셀 목사(오른쪽)와 빌 코트니
생전의 팀 러셀 목사(오른쪽)와 빌 코트니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제재소를 운영하고 있는 빌 코트니는 최근 종교 멘토였던 팀 러셀 목사를 코로나19로 잃었다. 미·중 무역분쟁과 코로나19 여파로 제재소가 부도 위기에 몰려 있지만 빌 코트니는 절망하지 않는다. 먼저 세상을 떠난 팀 러셀 목사의 조언대로 "사업을 하나님께 맡기면 내 가족과 내 삶도 그분께 의탁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월요일 저녁 늦게 전화가 왔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장로였다. "빌, 팀이 세상을 떠났대요."

팀 러셀은 우리 가족이 수년째 예배드리는 멤피스 제2장로교회의 부목사였다.
그는 2주 전 코로나19 진단을 받았다. 나와 마지막으로 통화할 때 그는 숨을 헐떡였다. 누구도 병원을 방문할 수 없었는데, 팀의 아내인 케이트조차 그랬다. 팀은 그렇게 홀로 세상을 떠났다. 팀은 목사 이상이었다. 좋은 친구이자 종교 멘토였다. 내가 아는 어떤 이보다 하나님과 신앙인이 되는 법을 많이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장례식은 없을 터였다. 멤피스는 봉쇄 상태였고, 공공집회도 금지됐다. 마음이 갈가리 찢어진 채 전화를 끊었다.

오랫동안, 특히 최근 들어 팀에게 많이 의지해왔다. 나는 제재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2018년부터 국제 무역분쟁으로 수익의 3분의 1이 감소했다. 거의 절반에 달하는 직원을 내보내고 장비를 매각했으며 내 급여의 3분의 1을 삭감했다. 2년이 지나자 재정상황은 최악에 이르렀다. 그저 견디면서 다른 어려움을 피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그러다 바이러스가 닥쳤다. 내 제재소에서 생산하는 미국 경재(硬材·굳고 단단한 목재) 시장이 붕괴했다. 운영관리자와 나는 공장에서 최소한의 직원을 감독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족과 격리하도록 집으로 돌려보냈다.

모든 일을 겪어내면서 하나님의 섭리, 은총에 관한 팀의 흔들림 없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교회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서 애쓰시는 하나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팀은 영화배우 같은 목소리로 "그게 바로 제가 아는 예수님이세요"라고 크게 말했다. 팀 덕분에 나도 그런 예수님을 알게 됐고, 하나님께서 자비로운 손길로 모든 것을 붙잡고 계신다는 걸 믿게 되었다.

"팀이 세상을 떠났대요." 통화하는 내 목소리가 들리자 바싹 다가왔던 아내 리사에게 말해 주었다.

"오, 빌." 우리는 서로 끌어안았다. 팀은 나와 아내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멘토였다. 우리는 종종 팀, 케이트와 함께 식사했는데 때로는 예배 후 점심에 두 사람을 초대했다. 몇 시간씩 이어지는 신학적인 대화에 빠져들기도 했다. 리사의 부모님은 우리와 함께 사는데 두 분도 팀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우리 같은 '어른이'(성인이지만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우리 모두 팀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간절했다. 아내와 장인·장모님은 요즘 집을 거의 나서지 않는다. 아직 대학생인 막내아들도 우리와 함께 집에서 피신 중이다. 첫째부터 셋째는 전국에 흩어져 있다.

가족이 위험에 처했다는 걸 아는 것만큼 남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사업체를 꾸리고 있는데 직원들을 챙길 수 없게 될까봐 두려움에 떠는 것도 마찬가지다.

팀은 내가 아는 두번째 코로나19 사망자였다. 또 다른 이는 지인이었다. 내가 아는 또 다른 누군가가 병에 걸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쩌면 나일 수도 있다. 건설 수요 때문에 제재소는 꼭 필요하다고 여겨졌고, 따라서 나는 계속 출근했다. 안전과 사업체 유지를 맞바꾼 셈이다.

아내와 나는 잠자리에 들면서 팀과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요즘 우리의 기도 목록은 길었다. 머리로는 하나님께서 여기 계신다는 걸, 애쓰면서 책임지고 계신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분명히 느끼기는 어려웠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결심할 수도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그가 안심이 되는 답장을 보내 주었는데. 이제 나는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팀 덕분에 배운 한 가지 교훈은 오롯이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나는 평생 꽤 오랫동안 자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네살 때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다. 우리 모자는 간신히 생계를 꾸렸고, 나는 대학 재학 내내 여러 일을 해야 했다.

교사와 풋볼 코치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리사를 만났고, 초임 교사 임금으로 가족을 부양하기는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목재회사의 영업직으로 옮겼고, 내 제재소를 차리는 단계까지 올라섰다. 근 20년이 지나자 회사는 직원 160명을 거느리고 전 세계 고객을 통해 연간 50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는 동안 멤피스 도심 고등학교에서 고군분투하는 풋볼팀을 이끄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코치가 되고 싶다는 꿈도 이뤘다. 풋볼팀 아이들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다큐멘터리 '언디피티드(Undefeated)'를 만들려고 영화 제작진이 찾아올 정도였다. 영화는 2012년에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그 후 나는 잠시 미디어에서 명성을 누렸고, 리더십 책도 썼으며, 오늘날까지 전국의 기업 행사나 회의에서 강연해달라는 요청도 받는다. '가이드포스트' 2014년 11월호에 아버지를 용서한 이야기를 기고하기도 했다.

대략 그 무렵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팀의 방식이 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맺힌 감정이 많았다. 우리 팀 아이들이 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지켜본 덕분에 용기를 내서 아버지가 내 삶에 불쑥 다시 나타났을 때의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매너서스고등학교에서 코칭하는 일에서 아들들의 풋볼팀을 거들어주는 일로 옮겨갔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팀은 멤피스를 떠나 보스턴 외곽의 기독교 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했다. 그가 그리웠지만, 내 사업도 2008년 금융위기에서 회복하는 중이었고 우리 가족도 성공가도였다. 하나님께서 날 보살펴 주신다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2018년에 오랫동안 서서히 불거진 미·중 무역분쟁이 전면전으로 번졌고,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은 모든 상품군에 관세가 날아들었다.

팀의 인도를 그토록 원한 적도 없었다. 그가 1년 전 제2장로교회로 돌아온 게 하나님의 타이밍 같았다. 팀은 창조를 확고히 책임지고 계시며 그 방식이 공정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전파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사업이 곤란을 겪을 때 팀의 말대로 하려고 애썼다. 나는 꾸준히 팀과 연락했으며, 그도 우리 가족과 연락하고 지냈다. 어느 날 밤, 제재소가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늦도록 자지 않고 누워 있는데 머릿속에서 팀의 목소리가 들렸다. 팀을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덕분에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팀이 떠나버린 지금은 아니다.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섭리였을까. 팀이 세상을 뜬 후의 나날은 이상했다. 지역 언론 매체들이 그의 사망 기사를 실었고, 나는 리포터들에게 그가 우리 공동체에 어떤 의미였는지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는 모든 이의 목사였어요. 심지어 '내' 가족의 목사이기도 했죠." 온라인으로 15분 동안 진행한 교회 강연에서 원로목사 조지 로버트슨이 말했다. 나는 출근하고 귀가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식료품을 사러 나섰다. 부활절이 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집에 갇혀 지내는 신세였다. 제2장로교회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내보냈다. 아내가 거실 불빛을 낮췄고, 우리는 격리기간 매주 일요일에 그래왔듯이 앉아서 지켜보았다.

"지금이 특이하다고 여겨진다면 최후의 만찬은 집에서 은둔하면서 들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 이 상황은 여러분이 살면서 참여한 가장 정통적인 성례일 겁니다."

로버트슨 목사가 말했다. 그 말은 팀이 종종 하던 얘기를 떠올리게 했다. "교회 예배의 청중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대접받으려고 교회에 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는 겁니다. 목사도 일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번에 예배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잡담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점을 기억합시다."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게 정말 기묘했다. 집 밖에서는 온 세상이 두려운 길을 계속 가고 있었다. 내 사업은 벼랑 끝에 매달린 형국이고, 내 아이들 대부분은 아직 멀리 있었다. 우리 공동체는 충격에 빠졌다. 팀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 순간, 하나님을 믿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됐다. 조용한 거실에 아내와 장인·장모님, 막내아들과 함께 있었고 로버트슨 목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배경에 깔렸다. 그리고 손에는 빵과 포도주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혼란, 두려움, 불확실성의 한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애쓰시며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미래로 모든 것을 옮기고 계신다. 내가 그려볼 필요 없는 미래다. 내 사업을 하나님께 맡기면 내 가족과 내 삶도 그분께 의탁할 수 있다. 내 슬픔도 신께 기댈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게 전부다.

마룻바닥에서 일어나면서 아마도 앞날이 만만치 않으며 한동안은 이미 견뎌온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또한 무엇보다도 친구 팀 러셀의 인도를 따르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것임을 알았다. 그러면 나는 괜찮을 것이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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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가이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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