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이불의 외침, 그 시작을 만나다

박지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3.08 18:30

수정 2021.03.08 18:30

썩어가는 날생선, '소프트 조각' 입은 퍼포먼스
1987년부터 10년간의 초기 활동 담은 '이불-시작展'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
세계적인 설치작가 이불
세계적인 설치작가 이불
세계적인 설치작가 이불의 초기 작품을 볼 수 있는 '이불-시작'전이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1990년 괴물을 연상케하는 천을 두르고 서울과 도쿄 거리를 활보한 퍼포먼스 '수난유감'
세계적인 설치작가 이불의 초기 작품을 볼 수 있는 '이불-시작'전이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1990년 괴물을 연상케하는 천을 두르고 서울과 도쿄 거리를 활보한 퍼포먼스 '수난유감'
제1전시실에 설치된 소프트 조각 작품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제1전시실에 설치된 소프트 조각 작품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세계적인 미술작가 반열에 오른 이불(57).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반체제 활동을 한 부모의 곁에서 그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변혁과 급속한 산업화를 바라보며 자랐다. 1987년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그는 전형적인 조각의 범위를 벗어난 '소프트 조각'을 시작으로 다양한 퍼포먼스와 오브제 작업을 통해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강화되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성 상품화 등을 형상화하는데 주력해왔다.

특히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프로젝트' 전시에 초대돼 화려한 비즈(beads) 장식을 날 생선에 꽂아 넣은 뒤 이 생선이 전시장에서 썩어가는 과정을 보여준 설치작품 '장엄한 광채'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지 25년이 지난 지금 그의 시작점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전시 '이불-시작'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진행중이다.
40여년 전부터 시작된 이불의 외침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동시대성을 띄고 있었다.

■'소프트 조각'부터 '퍼포먼스'까지

초기 10년 회고전시의 시작은 미술관 1층 로비 왼켠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두운 공간에 붕 떠있는 작품들의 모습은 기괴하다. 한 작품은 인형의 팔과 다리들을 모아 이어붙인 듯하고, 건너편의 또 다른 작품은 엉덩이 등 신체의 부분들이 이리저리 합쳐져 있다. 전시장 가운데에는 미끄덩한 내장과 같은 형체들이 덩굴가지처럼 서로 이리저리 엉켜 있다. 이불이 대학을 졸업한 직후 선보이기 시작한 '소프트 조각' 시리즈 작품 '무제(갈망)' 연작과 '몬스터: 핑크'가 다시 설치됐다. 조각이라 하면 흔들림 없고 단단한 물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에 대항하기 위해 작가는 푹신한 천과 솜을 사용해 조각을 만들었다. 만약 '쿡'하고 찔러볼 수 있다면 '푹'하고 들어갈 것 같은 조각들은 우리가 소위 생각하는 '기형'에 가깝다. 살처럼 부드러워 보이고 한가닥의 줄에 매달려 꿈틀거리는 모습이 마치 만화영화에 나오는 우주 괴물같이 보이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미와 추, 선과 악,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다시금 곱씹어보게 한다.

'소프트 조각'을 넘어 조각에 대한 이불의 묵상은 1990년대 초반 그 스스로를 조각화하는 단계로 진행됐다. 작가는 초기에 자신이 만든 '소프트 조각'을 입고 예기치 못한 상황속으로 출연하는 방식의 퍼포먼스를 펼치기 시작했다가 이후 다시 이를 벗어던지고 그 스스로가 조각으로서 세상에 화두를 던지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소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거나, 방독면을 쓰고, 여성의 엉덩이를 과장한 레슬러의 복장을 입고 퍼포먼스를 펼쳐냈다. 늙어가는 자신의 몸까지도 작품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고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낙태'와 '환경'에 대한 이슈를 다루고 이를 통해 주목을 받게 된다. 이불은 이를 통해 일관되게 남성 중심의 미술사와 남성 중심 사회가 구축해온 권위, 위계, 경계를 흔들었다는 평을 얻었다.

이번 전시에는 이불이 1988년 처음으로 펼친 퍼포먼스 '갈망'을 비롯해 그가 마지막으로 실연한 1996년 '아이 니드 유(모뉴먼트)' 퍼포먼스 기록까지 동시에 펼쳐지며 그의 작가적 사고가 어떻게 진화해 갔는지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관객 참여형 '히드라'도 다시 제작

블랙박스를 지나면 어느새 밝은 빛으로 가득한 세번째 전시장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초기 10년 작업에 대한 기록들이 담긴 곳이다.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록했던 그의 구상과 실제 착용했던 의상, 소품들이 전시돼 있다. 이불이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오르게 됐는지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치고 다시 출구를 향해 나서면 본관 로비 정중앙에 숨죽인 채 자리잡고 있는 바람빠진 대형 기구 같은 형체의 작품 '히드라'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1997년 처음 만들어진 이 풍선 조각은 이불이 관객들을 자신의 조각의 주체로 초대하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발점과 같은 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다시 만들어진 이 작품에 연결된 발펌프를 누르는 순간, 관객들은 이불과 함께 이번 전시에 어우러질 수 있게 된다.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그동안 '풍문으로만' 떠돌던 이불 작업의 모태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며 "초창기 이불 작가의 활동을 복기하면서 작가의 현재 작업은 물론이고 지나간 시대의 문화적 자원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5월 16일까지.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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