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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줌인] 고려의 마지막 개혁혼이 꺼지다 '공민왕 피살'

최경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7.10 03:39

수정 2021.07.10 03:41

<정변의 역사 ⑨>
고려의 마지막 개혁 군주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좌절
고려 제 31대 왕 '공민왕'과 부인 '노국대장공주'. 국립고궁박물관
고려 제 31대 왕 '공민왕'과 부인 '노국대장공주'. 국립고궁박물관
[파이낸셜뉴스] 고려 시대의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고려의 개혁을 위해 몸부림쳤던 한 왕이 있었다. 그 왕은 바로 고려의 제 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지속된 원(元)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自主性)을 되찾고자 노력했고,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지만) '신돈'(辛旽)이라는 인물을 중용해 정치, 사회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급진적인 개혁 노선을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기성 세력들의 극심한 반발과 사랑하는 부인의 죽음, 대내외적인 반란 및 침입 등으로 결국 공민왕의 개혁은 좌초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고려의 마지막 '개혁혼'(魂)이 사그라졌고, 이후 고려는 돌이킬 수 없는 '망국'(亡國)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고려 시대에 보기 드문 영민(英敏)함과 개혁 의지를 갖췄던 왕. 만약 개혁에 성공했다면 고려의 수명을 발전적으로 연장시키고 스스로도 성군(聖君)으로 남을 수 있었겠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비운(悲運)의 왕.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좌절, 그리고 피살(被殺) 전말을 되돌아봤다.


■반전, 왕위에 오르다
공민왕은 왕이 되기 전인 1341년부터 원나라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야 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에 종속돼 있었다. 수차례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 이후 고려는 원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고려 태자(太子) 등은 원나라에 볼모로 잡혔다. 또한 고려는 사위의 나라라는 뜻인 '부마국'(駙馬國)으로서, 고려 태자는 원나라의 공주와 혼인을 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1349년 공민왕은 원나라에 있을 때 원나라 공주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혼인을 했다.

공민왕은 1344년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봉해졌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공민왕은 왕이 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장자(長子)가 아니었고, 친모가 원나라 사람이 아닌 고려 사람이었다. 아울러 이 당시 선왕이었던 충목왕(忠穆王, 제29대 왕)이 후사(後嗣)를 보지 못한 상태로 즉위 4년 만에 병사(病死)했는데, 그 뒤를 이어 공민왕이 아닌 이복 동생인 충정왕(忠定王, 제30대 왕)이 왕위에 오르게 됐다. 결국, 공민왕은 옥좌(玉座)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나이가 어린 충정왕이 즉위한 후 수많은 외척(外戚)과 간신들이 등장해 전횡(專橫)을 일삼아 국정이 문란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이 같은 모습이 심화하자 1351년 원나라는 국정 문란의 책임을 물어 충정왕을 폐위(廢位)시켰고, 대신 공민왕을 왕위에 앉혔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이 당시 공민왕이 즉위할 때 부인인 노국대장공주가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원자주정책
기실 원나라는 공민왕을 신뢰했다. 공민왕이 오랜 시간을 원나라에 있으면서 원나라의 정책 방향과 문화 등을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봤고, 원나라 공주였던 부인(노국대장공주)과도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기반으로 고려에서 보다 적극적인 '친원(親元) 정책'이 행해질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빗나갔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부터 강력한 '반원자주정책'을 펼쳤다. 이처럼 의외의 정책이 나올 수 있었던 기저(基底)에는 무엇보다 공민왕의 냉철한 국제정세 분석이 있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 있으면서 대륙에서 돌아가는 정세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학습해 이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14세기 후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그동안 강력한 제국으로 군림했던 원나라가 서서히 쇠퇴했고, 새로이 중국 한족(漢族)이 중심이 된 명(明)나라가 부상하고 있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국운(國運)이 다했다고 보고, 이 기회를 잘 이용해 움츠러들었던 고려의 자주성 및 영토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또한 떠오르는 태양인 명나라와 유착(癒着)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우선 공민왕은 고려 사회에 파고들었던 몽고 풍습의 혁파(革罷)를 단행했다. 당시 대표적인 몽고 풍습으로는 변발(辮髮), 호복(胡服) 등이 있었는데, 공민왕은 어명(御命)을 통해 이를 완전히 금지시켰다. 이 와중에 '조일신의 난' 발생과 부원(附元) 세력 강화로 공민왕의 입지가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공민왕은 이에 굴하지 않고 1356년 다시 개혁정치를 단행, 몽고의 연호(年號), 관제(官制)를 폐지해 문종(文宗, 제11대 왕) 때의 제도를 복구했고, 원나라의 내정 간섭 기구였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도 폐지했다.

아울러 공민왕은 원나라의 위세에 편승해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기철(奇轍) 일파를 제거했다. 기철 일파는 원나라 황실과 인척 관계라는 점을 악용해 마치 왕족처럼 행동했고, 기황후가 출산한 아들이 원나라의 황태자에 책봉(冊封)된 후에는 공민왕마저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격분한 공민왕은 원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감수하고 기철 일파를 모조리 척살(刺殺)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민왕은 여세를 몰아 100년 이상 존속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며 원나라에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고려의 화주(함남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관부였다. 이후 1368년에 주원장(朱元璋, 명나라 태조)이 명나라를 건국하자, 공민왕은 최측근이었던 이인임을 급파해 명나라의 공조 약속을 받아낸 후 요동(遼東)에 남아 있던 원나라 잔존세력을 쫓아냈다. 2년 후에는 이성계를 통해 동녕부(東寧府)를 공격,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했다.

■연이은 악재
즉위 이후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은 매우 과감하고 신속하게 단행됐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개혁 군주 공민왕이 중심이 된 고려가 다시금 웅비(雄飛)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장밋빛 여정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공민왕 개혁 정치의 발목을 잡는 악재도 연이어 발생했던 것이다.

우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또한 내부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대표적으로 1363년 찬성사 김용의 난과 1364년 최유의 난이 있었다. 특히,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擁立)하려 했던 최유의 난은 고려에 큰 타격을 줬다. 또한 공민왕은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설치와 권문세족(權門勢族)이 중심이 된 도당(都堂) 권리 약화, 외방의 산관(散官)에 대한 통제 강화 등을 도모했는데, 이 같은 정책들은 권문세족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사실상 좌초될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1365년에 공민왕에게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이었다. 공민왕에게 있어 노국대장공주는 마치 분신(分身)과도 같은 존재였다.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을 때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에게 크게 의지했고, 공민왕이 즉위한 후 반원 정책을 펼칠 때 노국대장공주는 본인의 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민왕을 변함없이 지지했다. 현재까지도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런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공민왕은 큰 실의에 빠졌다. 가뜩이나 자신의 개혁 정치가 대내외적으로 큰 도전을 받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 그 아픔은 더욱 컸다. 공민왕은 더 이상 즉위 초 때의 총기(聰氣)가 넘치던 그 영민한 왕이 아니었다. 이전에 비해 국정을 등한시했고, 연회를 즐기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이런 가운데 공민왕은 대안으로서 한 인물을 불러 사부로 삼고 국정을 맡겼는데, 그가 바로 신돈이다.

■신돈 등장, 거침없는 개혁
신돈은 노비의 아들이자 승려였다. 그랬던 사람이 별안간 '왕사'(王師)가 됐으니 백성들 사이에선 신돈이 왕의 눈을 흐리는 '요승'(妖僧)이라는 소문도 퍼졌다. 공민왕의 신돈 발탁은 절박한 자구책이자 다른 대안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고려사 반역 열전에서 공민왕은 "왕이 왕위에 있은 지 오래됐는데 재상들 가운데에 많은 이들이 뜻에 맞지 않았다. 세신 대족들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서 서로 허물을 가려준다. 초야 신진들은 출세하게 되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신 대족의 사위가 되고 처음의 뜻을 버린다. 유생들은 유약하고 강직하지 못하다. 이 세 부류들은 모두 쓰기에 부족하다. 이에 세속에서 떨어져 홀로 선 사람(신돈)을 얻어 그를 크게 사용하겠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발탁된 신돈은 공민왕의 후원 하에 거침없는 개혁을 단행했다. 우선 개각을 단행해 많은 기성 대신들을 쫓아냈다. 이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지만, 신돈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속하게 기성 대신 및 좌주·문생 파벌을 축출했다. 대신 그 자리에 추후 조선 건국의 중심 세력이 되는 신진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시켰다. 아울러 몽골 침략 시기에 불탄 성균관 건물을 복구했다. 이후 성균관 총관리자인 대사성에 이색, 교육 책임자인 박사에 정몽주, 학관에 이숭인 등 상대적으로 온건 유학자들을 임명했고, 다음 세대를 이끌 지도자로서 신진 유학자들을 키워나갔다.

신돈은 과거 제도를 개선하는 정책도 추진했다. 이전까지 진사과(進士科), 명경과(明經科)로 분류해 봤던 과거 제도를 전면 개편해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세 단계로 설정해 시험을 치르게 했다. 향시를 통과한 응시자들을 대상으로 왕이 직접 참여해 시험 내용을 검토하고 합격자를 선발했다. 이에 따라 좌주와 문생들이 부정하게 결탁해 합격자를 배출하는 폐단이 사라졌다. 또한 권문세족과 공신자제들의 출세 특혜를 폐지해 오로지 과거 제도를 통해서만 벼슬길에 오르게 했다.

이어 신돈은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을 설치한 후 불법으로 점거된 토지, 농장에 불법으로 소속된 노비와 부역을 도피한 양민을 찾아내 정리했다. 더욱이 거대 사찰들도 정리했다. 이에 따라 천민과 노비들을 중심으로 신돈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했고, 급기야 이들이 대거 신돈을 찾아와 자신들을 양인(良人)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신돈은 이들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는 파격을 선보였다. 반면, 농장주 등 기득권 세력은 매우 위축됐고, 빠르게 나아가는 묘청발 개혁 열차를 힘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개혁의 좌초
신돈의 개혁은 급진적이었던 만큼, 머지않아 기성 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권력과 경제적 기반이 흔들렸던 권문세족 등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공민왕에게 나아가 신돈을 비하하거나 모함하기 시작했다. 또한 새롭게 성장한 신진 유학자들도 은근히 신돈을 멀리했고, 공민왕에게 성리학에 기반해 직접적인 정치를 펼 것을 요구했다.

이런 가운데 신돈의 사생활이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조선의 개국(開國) 세력들이 고려 망국의 원인을 찾고자 신돈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는지는 모르지만, 신돈이 여색(女色)을 심하게 밝혔고 수많은 재물들을 개인적으로 착복(着服)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공민왕은 개혁동지이자 스승인 신돈을 감싸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신돈의 사생활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개혁에 대한 기성 세력들의 반발이 극심해지자, 위기감을 느낀 공민왕도 서서히 신돈에게서 신임(信任)을 거두기 시작했다. 자신에 대한 주변의 공격이 거세지고 공민왕의 신임도 옅어지면서 신돈은 초조해졌다.

결국, 궁지에 몰린 신돈은 공민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돼 신돈은 수원으로 유배됐고, 이틀 후에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공민왕은 비단 신돈 뿐만 아니라 그 아들과 측근들도 모두 죽였다. 신돈이 제거되자 공민왕은 다시 기성 세력과 손을 잡았다. 공민왕의 후원 하에 의욕적으로 추진됐던 신돈발 개혁 정책들은 좌초됐고, 대부분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공민왕 피살, 망국
당초 영민한 개혁 군주로 출발해 백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공민왕은 이제 개혁에 실패한 초라한 군주로 전락했다. 신돈의 죽음으로 마지막 개혁 의지마저 꺾인 공민왕은 더 이상 국정을 돌보지 않았고, 매우 문란한 사생활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젊은 미소년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해 남색(男色)을 즐기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자제위의 리더격인 홍륜이 공민왕의 익비 홍씨를 범해 임신을 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주변의 안 좋은 시선을 의식했던 공민왕은 사건의 당사자인 홍륜과 밀고자인 환관 최만생을 제거한 후 익비의 입을 막아 이 사건을 덮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사전에 눈치챈 홍륜과 최만생 일파가 늦은 밤 공민왕의 침소(寢所)에 잠입, 역으로 공민왕을 시해(弑害)했다. 이 때 공민왕의 나이 44세였다.

공민왕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모니노'가 우왕(禑王, 제32대 왕)으로 즉위했다. 우왕은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들렀을 때 만났던 신돈의 몸종 '반야'로부터 낳은 자식이었다. 그러나 훗날 이성계 등 조선의 개국 세력들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로 규정했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昌王, 제33대 왕)을 폐위시킨 뒤 사사(賜死)했다. 폐가입진은 가짜왕을 버리고 진짜왕을 세운다는 뜻이다.

공민왕이 죽은 후 고려는 오래가지 못했다. 권문세족들의 전횡(專橫) 및 지배층의 갈등, 토지제도의 모순 등이 지속됐고, 대외적으로는 왜구 침입과 명나라의 압박이 고조됐다.
우왕 등 공민왕의 뒤를 이은 고려의 왕들은 초기 공민왕처럼 일말의 개혁이나 혼란을 잠재울 만한 역량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다. 결국, 공민왕이 사망한 후 18년이 지난 1392년 고려는 멸망했다.
고려의 빈자리는 새로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내세운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의 '조선'(朝鮮)이 대체했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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