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잊어라, 고도성장의 추억] (2부②) “예, 명 받았습니다”.. 기업내 뿌리깊은 ‘군대문화’

예병정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12.10 16:52

수정 2013.12.10 16:52

"예, 명 받았습니다".. 기업내 뿌리깊은 군대문화
"예, 명 받았습니다".. 기업내 뿌리깊은 군대문화

#. 사장이 나서서 장시간 일장 연설을 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은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서로 반말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선후배를 따지고 상명하복을 요구하는 한국의 조직문화가 경기력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예상은 적중, 그해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4강 진출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내게 됩니다. 저는 우리 가우스에서도 히딩크식 조직문화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회의 때 상사의 말이라도 틀린 게 있다면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말해 주세요. 상사도 부하직원의 말을 적극 받아들일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이에 대해 회의에 참석한 부장이 한마디 한다. "저기 그래도 회사 운영은 운동경기가 아닌데 그렇게 하면 위계질서가 무너져서 힘들지 않을까요?" 이에 대해 사장은 "아니 상사가 하라면 하는 거지 어디다 토를 달아!!"라고 호통을 친다.

네이버에서 연재되고 있는 인기 웹툰 '가우스 전자'의 한 장면이다.

이 웹툰의 댓글에는 '완전 공감' '저런 상사 꼭 있다' '모순이지만 불편한 진실이기도' 등의 소감이 달렸다. 웹툰 독자의 상당수가 실제 회사에서 이 같은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 해마다 겨울이면 백두대간을 비롯, 전문 산악인도 어렵다는 히말라야 등정에 나서는 기업이 인구에 회자된 바 있다. 가자니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 안 가자니 사장 눈 밖에 나 이 기업의 직원들은 유난히 겨울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는 자그마치 15년 동안 군대문화가 뿌리 깊게 지배했던 코리안리 기업문화 이야기다. 지금은 젊고 국제적인 감각을 지니며 직원상하 간의 소통을 중시하는 대표이사가 폭넓게 박힌 군대문화 청산에 여념이 없으며 그 결과 새로운 기업문화가 정착돼가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1990년대 이전 고도성장의 시기에는 같은 시간에 많은 물량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일사불란한 군대식 기업문화가 필요했다. 1인당 생산량을 높이느라 잔업과 철야를 밥 먹듯이 했다. 그러나 세계의 공장, 중국이 부상하면서 우리나라 기업들도 물건을 빨리 만드는 능력보다는 더 좋은 물건을 만드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기업들은 근무 환경과 처우, 조직문화 등을 개선해 행복한 직장, 창의적 인재 키우기에 관심을 쏟고 있다. 저성장 시대를 돌파할 블루오션을 창출하려면 창의적 기업문화와 인재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제도가 한국 기업에서 실시됐지만 공언한 것과는 달리 고도성장기의 타성을 벗어던지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잊어라, 고도성장의 추억] (2부②) “예, 명 받았습니다”.. 기업내 뿌리깊은 ‘군대문화’


■뿌리 깊은 '군대문화'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한국 기업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업에서 일하는 자신 스스로를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전국 직장인 100명을 대상으로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기업 문화가 100점이라면 자사의 기업문화는 몇 점이냐'고 묻자 평균 59.2점이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비해 기업문화 점수가 낮은 이유는 '상명하복의 경직된 의사소통 체계'(61.8%)가 가장 많이 지적됐으며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하는 분위기'(45.3%), '부서 이기주의'(36.7%), '지나친 단기 성과주의'(30.7%) 등이었다. 또 자신이 속한 직장이 보수적 기업문화를 갖고 있느냐는 물음에 71.5%가 '그렇다'고 답했고 87.5%는 창조경제시대에 걸맞은 기업문화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삼성경제연구소도 우리나라 직장인의 행복도가 55점으로 낮은 수준이라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특히 20대의 행복도는 48점으로 50~55세 직장인의 행복도인 61점에 비해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우리나라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27위로 여전히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정신질환으로 진료를 받는 환자 수도 지난 2010년 기준 231만명에 달한다.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는 한국인의 특성상(2011년 기준 주당 40.2시간) 직장에서의 행복은 전반적인 삶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그동안 진행된 우리나라 기업들의 '행복한 기업문화 만들기'가 아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여전히 '권위주의'나 '형식주의'와 같은 고도성장기의 군대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인 것.

'한국식' 기업문화는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국내 기업의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는 심심치 않게 군대식 훈련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병대 캠프에 참가해 라펠과 제식, 도하 훈련을 받거나 지리산 종주 등과 같은 행군을 프로그램에 넣는 경우도 있다. 국내 모 대기업에서는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카드섹션을 벌인 일도 있었다. 이를 통해 동기애와 회사 사랑을 느끼라는 것이지만 실상은 개개인은 부품, 스스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지만 전체를 이룰 때 가치를 가진다는 복종 문화의 또 다른 형태인 것.

[잊어라, 고도성장의 추억] (2부②) “예, 명 받았습니다”.. 기업내 뿌리깊은 ‘군대문화’


■한국판 구글도 존재한다

매출 기준 애플과 삼성전자를 비교하면 삼성전자가 더 많다. 하지만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에서 발표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의 순위로는 애플이 1위이고 삼성전자는 35위다. 미국 언론의 평가라는 객관성의 한계에도 기업문화에 대한 일반의 평가를 반영한 결과라는 평이다. 제품을 잘 만드는 제조업체는 '사랑받는' 회사에 머물지만 새로움을 창조하는 기업은 '존경받는' 회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정보기술(IT) 업체를 중심으로 한국판 '구글'.한국판 '애플'과 같은 기업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기업문화 바꾸기는 의외로 단순한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투비소프트는 지난해 조직 문화 혁신을 위해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는 사내 호칭을 '님'으로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연차나 서열에 관계없이 호칭을 통일해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기업문화를 자유로운 의견교환이 가능한 수평적 기업문화로 바꾸겠다는 것.

'꿈의 직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제니퍼소프트도 한국판 구글을 꿈꾸고 있다. 제니퍼소프트의 특징은 주 35시간 자율 근무에 있다. 출근과 퇴근, 복장, 장소 등에 관계없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 원하는 복장으로 주 35시간만 근무하면 된다. 또 회사는 35시간 이외의 시간을 직원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사내 수영장 △사내 음식 조리를 담당하는 호텔 주방장 채용 △직원 자녀의 교육을 위한 외국인 채용 등 다양한 복지제도를 마련했다. 제니퍼소프트는 직원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기업문화를 바꾸고 있는 것.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한국 기업들은 기업 내 군대문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고 직원복지를 비용으로만 생각했다"며 "최근 한국 기업도 위에서 시키는 일에 길들여진 '워커홀릭'에게 초과 근무수당을 낭비하는 것보다 스스로 일에 열중할 줄 아는 인재에게 복지비를 지출하는 것이 기업 경쟁력을 높인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군대문화' 왜 문제인가

△권위주의 △형식주의 △상명하복 등으로 대표되는 군대문화가 기업에 적용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창조적인 생각을 막기 때문이다. 글로벌 선두 업체들의 기업문화는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을 키워주는 방향으로 정착되고 있다. 창립 15년 만에 세계 인터넷 시장을 장악한 구글에는 '20 대 80'이라는 업무 정책이 있다. 이는 구글 개발자들이 전체 업무의 80%는 화사에서 결정된 일에 투자하고 나머지 20%는 자신이 원하는 프로젝트에 시간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정책이다. 개발자가 조직에 얽매여 강압적으로 일을 하게 되면 업무 능률과 창의성이 떨어지게 된다는 분석을 바탕으로 시행됐다. 덕분에 구글 내부에는 일주일에 하루나, 일년에 두 달은 눈치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업무에 투자할 수 있는 기업문화가 만들어졌다.

군대문화 아래에서는 신입 직원부터 고위 임원들까지 스스로 일하는 것보다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한다. 또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하기보다는 업무를 상사의 선호에 맞춰 수행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개인이 아닌 조직으로 움직이는 이 같은 업무 방식으로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나 성과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

특히 고도성장기에 한국 기업들은 선두를 빨리 따라가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의 입장이었지만 현재는 새로움을 창조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입장이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군대와 같은 기업문화는 기업 경쟁력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재계 관계자는 "구글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 대부분의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직원복지나 좋은 기업 문화 만들기를 위해 노력 중이다"라며 "반면 한국 기업들은 생산성 향상과 품질관리, 판매망 확충 등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 기업을 성장시키겠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탐사보도팀 최경환 팀장 예병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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