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기본으로 돌아가자] (6·끝) 시장경제 옥죄는 3대 규제법

장용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2.02 16:14

수정 2014.10.30 00:46

[기본으로 돌아가자] (6·끝) 시장경제 옥죄는 3대 규제법

1. 오너가 횡령·배임혐의로 구속된 A그룹은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특히 여러 계열사가 공동으로 하거나 다른 계열사에 대한 투자는 무조건 뒤로 밀린다. 또다시 '배임의 덫'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회사는 오너가 구속된 직후 해외에 세운 현지 법인에 수억달러의 투자계획을 추진했다. 그리고 해당 국가로부터도 적극적인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경영진이 판단을 미루면서 투자도 일단 '스톱' 됐다.

그리고 3년 동안 우물쭈물하는 사이 A그룹은 수십년간 공들여 해외에서 확보한 입지가 무너지고 중국,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 기업에 밀리는 처지가 됐다.

2. C그룹의 대주주이자 최고경영자인 D회장은 지난해 가을 국회에서 겪었던 수모를 생각하면 아직도 잠이 오지 않는다.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불려나간 그는 하루 종일 국회의사당 복도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국회에서 오전 10시까지 오라고 했지만 실제 증언은 오후 3시가 지나서 시작됐고 5분 만에 끝났다. 하지만 저녁에 회의가 속개되면 다시 증언할 수도 있다는 국회 관계자의 말을 듣고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는 밤늦게까지 대기했지만 다시 부르지 않았다. '바쁜 사람 불러놓고 뭐하나' 싶었지만, 한마디도 못하거나 다시 불려간 기업인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관련기사 ☞ 기본으로 돌아가자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기업과 기업인들이 헌법에서 정해진 기본 권리인 '경제자유권'이 갈수록 심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경제력 집중과 '강자의 독식'을 막기 위해 도입된 각종 제도와 규제들이 당초 취지와는 달리 경제민주화의 탈을 쓰고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체제의 '기본'인 경제적 자유를 제약하려다 생긴 부작용이라는 게 법조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현행 헌법 제119조1항은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자유를 대한민국 경제질서의 기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제14조)와 직업선택의 자유(제15조)를 가진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6·끝) 시장경제 옥죄는 3대 규제법

■'경제자유 3敵'에 경제기반 흔들

2일 법조계와 경제계에 따르면 산업현장에서는 △범위가 모호한 횡령.배임죄 △소수의 '꾼'들에게 악용될 소지가 큰 소액주주 대표소송제 △나날이 늘고 있는 규제폭탄 등을 경제 활동을 저해하는 '3적'으로 꼽는다.

이 가운데 기업의 최고경영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바로 배임죄다. 배임죄는 사전적 의미로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에 위반해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고 법인에 손해를 가하는 것'이다. 원래 기업의 재산을 경영자가 개인의 재산처럼 쓰는 것을 막아 다른 주주나 채권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됐다.

문제는 적용대상과 요건이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해 법을 집행하는 이의 주관에 따라 죄의 성립 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재계는 "어디까지가 합법이고 어디부터가 범죄인지 구분이 어렵기 때문에 기업인들의 가장 큰 경영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법을 집행하는 법조계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정상적인 경영상 판단은 배임죄 처벌대상이 아니다"라는 대법원 판례가 있지만 "기업 오너들이 '경영상 판단'을 안 해서 그렇게 된 것이냐"고 따져 물을 때마다 설명에 진땀을 뺀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사법부의 '경영상 판단'과 현장기업인들의 '경영상 판단'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전문소송꾼 배 불리는 다중대표 소송

정부가 추진 중인 상법개정안의 다중대표소송제도도 도입 취지보다는 전문소송꾼 양성이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제도는 모회사 주식의 1%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주가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제도는 대주주의 전횡을 막고 소액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 전문 '소송꾼'들의 배만 불려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실제 미국에서는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전을 벌인 뒤 거액의 합의금을 받아 챙기는 '전문소송꾼'이 대거 활동하면서 기업 경영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제도는 나아가 경쟁업체의 정상적인 경영을 방해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거나 외국 투기자본들의 공격에 국내기업들이 고스란히 노출될 위험성도 크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다중대표소송 제도가 우리 법체계 정석에서는 벗어난 제도라는 점이다. 현행 상법체계에서는 모회사와 자회사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회사(법인격의 독립성)로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경영에 직접 간섭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다중대표소송제도는 이런 상법상의 기본원칙에 대한 중대한 수정이다.

제도의 취지와 필요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예외적·제한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근거다. 전경련 관계자는 "다중대표소송은 악의적으로 남용될 우려가 큰 제도인 만큼 보완대책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슈퍼갑' 국회의 증언·감정법

'국회에서의 증언·감정에 관한 법률'이 '최고경영자 길들이기'로 남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법률은 국정감사나 조사와 관련해 증인.참고인으로 출석 요구를 받을 경우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응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는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법률제정이나 정책결정, 행정부 견제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원활하게 수집하기 위한 제도다.

그런데 굳이 부를 필요가 없는 기업까지 증인명단에 포함시키거나 불필요하게 오랜 시간 대기시키는 등으로 인해 기업경영 활동을 저해한다는 지적이다.

기업 관계자들은 국정감사에 기업 총수가 증인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해당 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대외 신뢰도나 브랜드 가치를 손상시킬 우려가 크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증인으로 불려간 기업 총수들을 장시간 대기시키는 경우 업무에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국회의 한 전문위원은 "기업이나 정치권 모두 '기본'을 지키는 페어플레이 정신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재계 “배임죄, 경영상 판단 기준 명확해져야”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저해하는 '적(敵)'과 관련해 재계는 전체적으로 제도의 필요성은 공감한다면서도 각론에선 합리적인 방향으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법조계도 제도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명확한 기준이나 운용상의 문제"라며 "시장경제체제라는 기본 원리에 맞게 세부적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배임죄, 기준 명확히 해야

재계가 가장 불만을 가지고 있는 배임죄와 관련해 법조계는 '경영상 판단'의 범위가 확대되고 기준이 명확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상적인 경영상 판단'을 한 것이면 배임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지만 무엇이 '경영상 판단'인지에 대해 명확한 기준이 없고 인정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것이다.

법무법인 화우의 양호승 변호사는 "어떤 의사결정이 배임인지 기준이 불확실해 필요한 투자나 의사결정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면서 "의도적으로 사익을 추구한 불법.부정 행위에 한해서만 배임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 변호사는 "배임죄 적용 주체나 규제 요건을 유형화.구체화하고 '적법절차에 따른 경영판단 행위에 대해 배임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신설"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시했다.

차입매수(LBO)도 피인수 기업에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면 배임죄 처벌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법무부 역시 '합법적 LBO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아직 진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악용.남용 여지 없애야

악용 가능성이 제기되는 다중대표소송제도도 법원의 제소허가 등 사법부가 소송요건 심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다중대표소송을 도입한 영미법계 국가에서도 법원의 제소허가 등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일본은 다중대표소송 도입을 논의하면서 악용 및 남용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며 "모회사가 자회사 주식을 100% 소유하면서 모회사의 자회사 주식가액이 모회사 총자산의 20% 이상인 중요 자회사에 대해서만 소 제기가 가능하도록 하는 등의 예외조항을 둘 것"을 제안했다.

국회가 대기업 최고경영진을 국정감사나 청문회에 출석시키는 것 역시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 재계와 법조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서울지역에서 활동하는 한 중견 법조인은 "제도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운용의 묘를 살릴 필요가 있다"며 "경영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증인 출석에 대한 예외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경지역의 법원 관계자도 "증인 출석을 거부하면 무조건 형사처벌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국정감사의 편의를 위한 과잉 입법"이라며 "기업인을 증인으로 소환하는 것은 정부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때에 한해 보조적 역할로서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ohngbear@fnnews.com 장용진 이다해 기자

■배임-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에 위반해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고 법인에게 손해를 가하는 것

■다중대표소송- 모회사 주식의 1%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주가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

■국회의 증언·감정법- 국정감사나 조사와 관련해 증인·참고인으로 출석 요구를 받을 경우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응하도록 하는 규정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