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석의 통일이야기] (10) 동독의 자유총선거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8.24 16:59

수정 2014.08.24 16:59

[양창석의 통일이야기] (10) 동독의 자유총선거

서독 콜 총리는 동독의 급변사태에 대한 정책목표를 '동독의 안정화'에서 '조기 통일'로 변경했다. 대규모 탈출, 시위, 통일요구 등 동독 시민의 힘이 통일의 속도를 결정했던 것이다. 동독 시민은 자유총선거를 통해 통일의 방법도 결정했다.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동독의 새로운 인민의회와 정부가 서독 연방 가입을 통한 통일을 의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콜 총리는 '동독인들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하고, 서독은 그들의 자결권을 존중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자결권 존중은 '전체 독일 민족은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자유로운 자결권 행사를 통해 완성해야 한다'고 규정한 서독의 기본법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동독 시민이 자결권을 행사한 자유총선거의 경위와 결과를 살펴본다.

급변사태에 처한 동독 정권에 서독은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포기하고 자유총선거를 실시하는 정치개혁을 강하게 요구했다. 국가 권력이 붕괴하고 내부 혼란이 심화되자 동독의 모드로정부는 1989년 12월 초 시민운동 단체들과 원탁회의를 구성했다.

이 원탁회의의 가장 큰 성과는 인민의회 총선거를 1990년 5월 6일 실시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독의 위기상황이 가속화되면서 3월 18일로 앞당겨지게 됐다. 이로써 서독의 콜정부와 동독 시민이 요구해 온 자유.민주.비밀 선거가 마침내 현실화됐다.

총선거가 앞당겨지자 서독의 정당들은 동독 정당들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동독 선거에 개입하게 됐다. 야당인 사민당은 1990년 1월부터 자매정당인 동독 사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브란트 명예총재 등 당 지도부가 선거지원 유세에 나섰다. 그러나 사민당은 동독의 주권을 유지하는 가운데 서독의 사회보장제도를 헌법적으로 확대하는 단계적 통일을 제안했다.

한편 콜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은 동독의 어느 정당을 파트너로 할 것인지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동독에도 기민당이 있었지만 공산당과 연립정부에 들어가 있어서 많은 동독 주민으로부터 경멸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콜 총리는 동독 기민당과 독일사회연맹, 민주혁신당을 하나로 묶어서 '독일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직접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등 동독의 주요 도시를 돌면서 선거 지원유세에 나섰다. 여섯 차례의 지원유세 동안 100만명 이상의 동독 주민이 그의 연설을 직접 들었다. 콜 총리는 선거 유세에서 조기통일을 제안하면서 동독인도 서독인과 똑같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한 3월 13일 선거 유세에서는 1대 1 화폐교환을 발표했다. 자유총선거에 대한 동독 시민의 관심은 대단했다. 투표율이 무려 93.4%에 달했다. 선거 결과는 조기통일을 공약한 '독일동맹'의 압도적 승리였다. 동독 유권자는 통일 이후 곧 서독과 동일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한 콜 총리를 더 신뢰했던 것이다.

이들은 잘사는 서독과의 통일을 간절히 원했다. 서독 마르크를 갖고 싶었고, 서독 복지제도의 혜택을 원했던 것이다. 반면 서독 사민당의 총리후보인 라퐁텐은 유권자에게 동독에 머물러 있으면서 통일 속도를 늦추는 것이 그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 전까지 여론조사에서 압승할 것으로 예상됐던 사민당이 역전패한 것은 유권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총선 결과는 독일 통일이 가속화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국내적으로는 화폐통합을 위한 동서독 정부 간 협상이 본격 추진됐다.
대외적 환경도 통일에 유리하도록 바꿔 놓았다. 동독 주민이 조기통일을 원한다는 것을 투표로 전 세계에 보여줬기 때문이다.
소련으로선 동독정부를 통해 통일 속도를 늦춰 보려는 희망을 포기해야만 했다.

양창석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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