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유산 아픔에 우울증 시달리다 건물 방화…법원 ‘선처’(종합)

뉴스1

입력 2014.05.14 20:05

수정 2014.05.14 20:05

“정말 죄송합니다…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사회에 이로운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신이 사는 다세대 빌라에 불을 지른 20대 주부를 법원이 선처했다.

서울동부지법 제11형사부(하현국 부장판사)는 자살을 기도하기 위해 자신이 사는 다세대 빌라에 불을 질러 주민 2명에게 부상을 입힌 혐의(현존건조물방화치상)로 기소된 정모(28·여)씨에게 징역 1년3월에 집행유예 2년을 14일 선고했다.

평범한 20대 여성으로 살아오던 정씨는 지난해 5월 자신이 어머니가 된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뻤다. 비록 결혼식을 올리기 전이었으나 임신소식에 정씨는 지난 2년간 다닌 회사도 그만두고 ‘아이’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정씨에게 ‘태아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청천벽력같은 비보가 들려 왔고 정씨는 같은 해 6월 인공유산을 결정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있지 않아 오랜 기간 동안 키우던 강아지마저 정씨의 곁을 떠났다.

이후부터 정씨는 아이를 떠나보냈다는 죄책감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같은해 8월 바라던 결혼식을 올렸으나 우울증은 점차 심해지기만 했다.

이 우울증은 정씨에게 “나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나…”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정씨는 점차 엉뚱한 말을 하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고 불안·초조해하며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급기야 정씨는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1~2주일간 전혀 잠을 자지 못하는 등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그리고 같은달 25일 친인척으로부터 꾸지람까지 들으며 “내가 남편을 욕되게 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난해 12월 28일 오전 9시40분쯤, 토요일을 맞아 대부분의 가족들이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정씨는 남편이 출근하고 집안에 홀로 남았다.

‘죽고싶다’라는 생각만이 정씨의 머릿 속을 맴돌았고 정씨는 급기야 흉기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또 다량의 진통제를 입 안에 털어넣고 집안에 있던 에프킬라를 흡입했다. 그래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정씨는 자신의 집 안방에 있던 이불에 라이터 불을 당겼다.

불길이 이불을 감싸자 정씨는 이윽고 정신을 차리곤 밖으로 뛰쳐나와 “불이야, 불이야”를 외치기 시작했다. 6층짜리 12가구가 거주하는 건물에서 혹시나 부상자가 나오진 않을까 화마가 휩쓸던 빌라에서 가장 늦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정씨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소방대원들을 찾아가 “내가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경찰과 소방은 정씨의 인적사항을 파악하곤 정씨를 인근 병원으로 이송시켰다.

이 불로 건물 내 주택 12채가 불에 타는 등 소방서 추산 7860만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또 같은 건물 303호와 501호에 살고 있던 주민 박모(30·여)씨와 양모(11개월)군이 연기를 흡입해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이날 재판의 쟁점은 범행 당시 정씨가 ‘심신미약’의 상태였는지, 정씨가 범행 사실을 ‘자수’했는지 여부였다.

법원으로부터 정씨에 대한 정신감정 등을 의뢰받고 두 차례에 걸쳐 정씨를 진료한 송지영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범행 당시 정씨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죽어’라는 환청과 망상 등에도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며 “정씨는 인격의 장애로 인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충동이 조절되지 않아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정씨의 우울증이 치료가 없을 경우 다시 심화될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로선 방화라든지 재범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생각한다”며 “정씨는 향후 1년간 우울증에 대한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씨의 친언니 역시 “사건이 발생한 시기 동생은 이야기의 주제 없이 횡설수설하며 이야기했다”며 “또 ‘모든 게 나 때문인 것 같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이야기만을 했다”고 말했다.

정씨가 ‘자수를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 언니는 “당시 현장에 있던 경찰관으로부터 동생이 건물에서 바로 나와 ‘불은 내가 질렀다’라고 말했다는 설명을 들었다”며 “또 주변 증인들 역시 동생이 ‘불이야, 불이야’를 외치며 건물에서 나왔다가 또 다시 들어가 ‘건물에 아이와 강아지가 산다’고 외쳤다고 한다”고 밝혔다.

정씨의 변호인 역시 당시 관할경찰서의 사건 일지를 통해 정씨가 불이 난 건물에서 가장 늦게 나왔고 또 경찰을 찾아와 “내가 불을 질렀다. 잘못했다”라며 자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검찰 측은 “일지만을 보면 정씨가 먼저 경찰에게 다가갔다는 표현이 있어 자수를 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다만 검찰 측은 정씨가 당시 이불을 쌓아 놓고 라이터로 불을 지르는 등 차분하게 범행을 실행했고 또 불을 지른 후 이웃에게 대피하라고 한 점,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기억하며 경찰에 진술한 점 등을 통해 정씨가 범행 당시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검찰 측은 정씨의 범행이 자칫하면 수십명의 생명을 잃게 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정씨의 변호인은 이같은 검찰의 주장에 “정씨가 앓았던 우울증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범행에 대해 굉장히 반성하고 있다”며 “정씨에게 실형이 선고되기 보다 치료를 통해 정씨를 사회에 복귀하게 하는 것이 옳다”며 집행유예 선처를 호소했다.

국민참여재판에 참석한 배심원이 정씨 재판에 대해 평의를 진행하는 동안 이날 그림자 배심원으로 참여한 7명의 기자들도 모의 평의를 진행했다.

그림자 배심원 제도는 정식 배심원과는 별도로 구성돼 재판 전 과정을 지켜보고, 실제 배심원과 똑같이 평의 및 평결절차를 거쳐 결론을 도출해내는 모의배심원제도다. 정식 배심원단에 노출되지 않고 방청객을 가장해 재판과정을 지켜본다는 의미에서 ‘그림자’라는 용어가 붙었다.

그림자 배심원의 평결 내용이 판결에 반영되지는 않지만 재판 과정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해 재판의 투명성을 높인다는 장점이 있다.

7명의 기자들은 정씨가 ‘유죄’라는 점에는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다만 정씨가 실형을 선고받아야 할지, 집행유예를 선고받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이날 재판의 주요 쟁점인 정씨가 심신미약 상태였는지 여부와 범행 사실을 자수했는지 여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고 그 결과 1명의 기자를 제외한 6명의 기자들은 모두 집행유예 의견을 내놨다.


같은 시간 평의 절차를 밟은 국민참여재판 정식 배심원 역시 정씨의 심신미약과 자수 여부 등을 인정, 정씨에 집행유예를 선고해야 한다는 의견을 도출했다. 총 9명의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렸고 4명이 징역 1년3월에 집행유예 2년, 3명이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 1명이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 1명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등의 의견을 냈다.


재판부는 정식 배심원들의 의견을 반영해 “정씨가 과거 범죄를 저지른 경력이 없고 현재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점, 대부분의 피해자가 정씨와 합의한 점 등을 참작했다”며 정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서울=뉴스1) 권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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