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대기업

[新온고지신] 현대, 쌀집점원에서 기업총수로

박찬흥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7.13 09:48

수정 2014.11.07 15:55


현대그룹의 역사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경제발전사와 맥을 같이한다. 국내 최초로 해외건설시장을 개척하고, ‘기계공업의 꽃’으로 불리는 자동차산업의 활로를 연 현대그룹. 조선·철강·유화 등 국가 기간산업인 중화학산업을 개화(開花)시킨 현대그룹은 한국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기업이다. 재계의 거인(巨人)이었던 정주영 회장 타계후 ‘현대가 법통’을 잇는 정몽구회장은 현대자동차그룹을 재계 4위의 반열에 올렸다. 정몽구회장은 오는 2010년 현대차그룹을 글로벌 톱5에 올려 과거 ‘정주영 신화’를 재현시킨다는 계획이다.

파이낸셜뉴스는 한국경제의 큰 별이었던 정주영회장과 정몽구 현대차그룹회장의 경영철학과 경영기법을 조명하고 ‘현대’의 기업역사를 반추해 ‘옛 것을 통해 다시 배우는’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격동의 한국경제사 중심에 섰던 아산(峨山) 정주영=‘쌀 집 점원에서 기업 총수까지.’ 정주영 회장은 1915년 11월25일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韓成實)씨 사이에서 6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은 휴전선 북쪽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가 정회장의 고향이다.

그는 코흘리개 나이인 열살때부터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새벽 4시면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들판에서 김매고 흙돋우는 생활을 했다. 소년시절 정주영에게 땅만 파고 살아야 할 앞날은 그야말로 ‘비극’이었다. 그래서 정회장은 무려 세번의 가출을 한다. 소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했던 사건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계속된 가출끝에 ‘안착’한 곳은 서울시내 복흥(福興)상회 라는 쌀가게. 비록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지만 월급은 쌀 한가마니였다. 여기에서 그의 첫번째 성공이 이뤄진다. 그 후 성실하게 일한 정회장은 적지않은 재물을 모으면서 독자적으로 쌀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경일상회라는 이름의 쌀가게를 갖게 된 것이다. 이 때 정회장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현대자동차의 모태가 된 ‘아도서비스’=정회장이 쌀가게 이후 기업의 씨앗을 처음 뿌린 곳은 자동차 수리공장이었다.

1940년, 정회장이 서울 최대의 경성서비스공장 직공이던 이을학씨를 만난 것이 자동차수리 공장에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아현동에 아도서비스라는 차 수리공장이 있는데 그걸 한번 해 보지 그래요.” 이을학의 제의로 시작된 아도서비스의 경영은 정회장에게 훗날 현대자동차라는 세계적 기업을 만드는 모태가 됐다.

산골 소년이 정비업체 사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일제 치하의 열악한 경제상황과 제한된 기업활동에서도 정회장은 이 기간 직접 자동차 수리에 매달리며 기초적인 자동차 구조와 원리를 습득하며 언젠가는 내손으로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후 일제인 1943년 기업정리령에 따라 자동차 정비업에서 잠시 손을 뗀 정회장은 한 때 운수업에 간여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현대자동차 공업사를 설립, 다시 자동차 정비업에 투신하였다.

이 때의 영문 상호는 오늘 날 현대자동차와 같은 ‘Hyundai Motors Company’였다.

거대한 ‘현대호(現代號)’의 출항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현대토건사’ 태동=자동차공업사 일에 몰두하고 있던 정회장에게 어느날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자동차 수리서 견적을 넣기위해 관청과 미군을 드나들던 어느날, 건설업자들이 거액의 공사비를 수금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당시 정회장은 하루종일 일하고 30만원을 벌었는데 건설업자들은 한번에 1000만원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욕심이 생겼다. 정회장은 이 때 ‘현대토건사’라는 건설사를 세웠다. 자동차 수리업만 하다 토건업에 뛰어들겠다는 정회장의 행동을 말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는 강행했다.

1947년 5월25일, 결국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사 간판이 올라가면서 지금의 ‘현대건설’의 거대한 출항이 시작됐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정인영(정회장 친구)이 미군 공병대의 통역을 맡은 게 계기가 돼 미군 숙소를 짓는 일에 손을 대며 거액을 모을 수 있었다.

현대토건사는 특히, 52년 12월에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시작된 대통령숙소 공사에서 완벽한 시공에 감탄한 미군으로부터 ‘현다이 넘버원’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더구나 한겨울 부산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 달라는 미군의 이색적인 제의에 정회장이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냐”며 반문한 뒤 낙동강가의 보리를 옮겨 심은 기지는 ‘원더풀, 굳 아이디어’라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쳇말로 미8군 공사는 모두 ‘정주영 것’이 됐다.

그후 57년 9월 현대가 한강 인도교 공사를 따낸 것은 국내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됐고 62년에는 국내 도급순위 1위를 차지했다.

정회장은 65년 9월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해외로 진출했고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66년에는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공사에 준설공사 경험을 쌓아 중동 진출의 초석을 마련했다.

일본 기술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크리트댐을 사력댐으로 바꿔 예산을 절감한 67년 소양강댐 건설에 이어 68년 2월 착공해 2년5개월만이라는 세계 최단시간 완공이란 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주영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역작이었다. 정회장은 고속도로가 시공되면서 현장에 간이침대를 놓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를 비롯한 현대 임직원들은 국가적인 대사 앞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니 잠이 오지 않았다.
계절을 느끼지 못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

추풍령에 세워진 고속도로 기념비의 글도 이런 노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길.’

이렇게 현대토건사에서 현대건설로 이어지는 ‘대역사’는 시작되었다.

/ pch7850@fnnews.com 박찬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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