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우리의 문제는 정치에 답이 있다] (4) 세월호 참사 막을 선박 법안 쌓여있었는데..1년여간 ‘방치’

박소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4.22 17:58

수정 2014.10.28 04:54

[우리의 문제는 정치에 답이 있다] (4) 세월호 참사 막을 선박 법안 쌓여있었는데..1년여간 ‘방치’

#1. 지난해 말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B의원은 비장한 마음으로 법안소위 회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대선 이후 여야 간 정쟁국면에서 힘들게 열린 법안소위다. 국회 처리가 급한 민생법안들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B의원은 마음을 다잡는다. 여론 비판 속에서도 해내야 할 과제가 있어서다. 오늘 법안소위를 파행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지역 민원을 기필코 해결해야 한다.
경남 창원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B의원은 상임위에 계류돼 있는 지역 현안 관련법이 처리되지 않으면 그 어떤 소위원회 법안심사에도 참여할 수 없다며 버티기 작전에 들어 갔다.

#2. 지난 2009년 말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법안소위 테이블에는 처리해야 할 법안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여야 법안소위원들은 몇십분째 한가지 법안을 두고 승강이를 벌이고 있다. 나름 심도 있는 법안심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위원들 간 논쟁거리는 '삭도'라는 단어다. 케이블카 영업주의 종업원 관리.감독을 강화해 안전사고를 예방토록 한다는 내용의 '삭도.궤도법 일부개정법률안'에서 '삭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맞는지 여부를 두고 치열한 담론(?)이 형성된 것이다. 당시 법안소위에 참석했던 A보좌관은 "단어 하나를 두고 의원들이 힘을 빼면서 정작 법안 내용은 깊게 논의되지 못했다. 참 답답하고 한심했다"며 과거 기억에 인상을 찌푸렸다.

국회가 자신들의 권한인 법안 발의에는 적극적이면서 법안심사라는 의무에는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거세다. 세월호 침몰 사건의 원인이 총체적 부실에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이 같은 국회의 법안 방치 행태가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1년여 동안 통과되지 못한 법안 중 선박 입항 및 출항 관련 법률, 선박교통사고처리 특례 법안같이 사고의 발생과 예방에 직접 관련된 법안들이 여야 간 정쟁 속에 방치돼 왔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전문성이 부족한 의원과 보좌관, 지역구 이해를 우선시하는 정치권의 속성, 정쟁으로 인한 법안심사시간 부족, 법안소위 폐쇄성 등이 권한만 있고 의무는 사라진 입법부를 만들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세월호 사고 났는데…정쟁에 '방치'

의원입법평가시민위원회에 따르면 19대 국회가 출범해 지난 2월까지 총 1070건의 법률(제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가운데 법률안 419건의 경우 국회를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은 평균 1.3일에 불과했다. 이번 국회에서 가결통과됐던 법률안의 절반 가까이가 이틀이 채 걸리지 않는 동안에 처리된 것이다. 국회에 계류된 법안들 내용을 중점적으로 심사하는 법안소위가 얼마나 졸속으로 진행됐는지를 방증하고 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된 선박 관련 법안이나 결의안은 현재까지 18건이 국회에 발의됐다. 하지만 이 중 통과된 것은 5건에 불과했다.

최근 국회 상황도 마찬가지다. 여야가 4월 임시국회 의사일정에 합의했지만 국회의 본업인 법안심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여야 간 끊이지 않는 정쟁으로 정치권이 대치국면을 이어가면서 법안심사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상임위별로 계류돼 있는 법안은 총 7095개다.

■발의서 처리, 이틀이면 충분? 심사 폐업도

우선 정무위원회는 지난 10일 열린 전체회의부터 5.18 기념곡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지정해달라는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파행일로를 걷고 있다.

정무위 법안소위는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법안 '빅딜'을 시도하다 가로막히면서 단 2건의 법안 처리로 여론의 '뭇매'를 맞자 이번 4월 임시국회에는 무려 6차례 회의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새누리당 지도부와 국가보훈처장이 다른 국경일 노래와의 형평성을 문제 삼아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자 소위는 지난 11일에 이어 14, 17일에도 파행됐다.

기획재정위도 마찬가지다.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안홍철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의 트위터 논란으로 파행 국면을 거듭하고 있다. 기자회견을 열고 기재위 차원에서 안 사장의 사퇴 입장 건의,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해명 등을 듣는 조건으로 기재위 정상화를 합의했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여전히 안 사장 사퇴 없이 조특법을 제외한 나머지 법안 처리는 없다고 못박고 있다. 야당 간사인 김현미 의원은 "4월 말까지 안 사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다른 안건 처리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법안소위 정상화를 위해서는 상임위원회를 쪼개는 대안밖에 없다는 자조도 흘러나오고 있다. 미방위는 벌써 10개월째 법안 처리 '0건'에 머물러 있다.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미방위 여야 법안소위 위원들은 새벽 1시까지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 개인정보보호법, 원자력안전법 등 총 89건의 법안을 심사해 다음날 일괄 의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방송공정성 법안에 포함된 편성위원회 구성 방식에 새누리당 지도부가 뒤늦게 딴죽을 걸면서 협상 내용이 번복되자 법안소위는 파행 두 달째 여야 원내지도부, 미방위 여야 간사 간 협상만 반복되고 있다.

■문화 바꾸고, 법안소위 전문성.투명성 높여야

힘들게 법안소위가 열려도 법안 내용에 대한 의원들의 진지한 토론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에서 파견 나온 전문위원들의 검토보고서에 의존, 법안소위에 회부된 법안들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처리하는 일이 다반사다. 결국 다양한 이해관계가 균형 있게 반영돼야 할 법안들을 심사 과정에서 반쪽짜리 법안으로 전락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국회 관계자는 "법안소위에서 의원들은 전문위원들이 작성한 검토보고서 내용대로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복잡한 현실을 반영해야 할 법안들이 행정부 입장에만 쏠려 처리되는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이같이 한심한 국회 법안심사가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정치 문화를 바꾸는 근본적인 해결책과 함께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본부 사무총장은 "국회 법률심사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법안소위원을 정할 때 각 당이 전문성을 최우선 고려하고 보좌관 채용 때도 법률적 전문성이 담보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현재 속기록만 남기고 있는 법안소위 회의 과정을 전면 공개함으로써 국민적 감시가 가능토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회의원이 낸 법안에도 규제영향평가를 도입하자는 법안(국회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수개월째 맴돌고 있다. 이 법안을 심사하는 국회의원이 규제영향평가 도입으로 인한 입법권 침해를 우려, 법안 심사만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영향 평가=법안 발의 위축?

정부 입법의 경우 관계부처협의, 당정협의, 입법예고, 규제개혁위원회, 법제처 심사, 차관·국무회의 심사 등 최소 6단계를 거치는 데 비해 의원입법은 국회 법제실만 발의할 수 있어 입법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외부에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의원입법에 규제영향평가를 도입하자는 법안 취지는 의원들이 자신이 낸 법안이 성장, 고용, 환경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순기능과 역기능을 알아보자는 것으로 '입법권 침해' 우려는 핑계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의원이 권리만 좇으면서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지 않으려 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국회 운영위원회는 지난 16일 법안소위를 열고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회법 개정안을 심사했지만 결론을 내지 않은 채 종료했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규제영향평가 도입이 국회의 법안발의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계속 논의를 주장했고, 여당인 새누리당 역시 향후 공청회를 열어 이 법안 도입의 영향력(?)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으로, 야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법안소위 소속 한 의원은 기자와 통화에서 "여당 일각에서도 규제영향평가 도입 파급효과에 대한 숙지가 더 필요해 공청회를 열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법안을 대표발의한 이 의원 측은 의원입법에 규제영향평가 도입과 입법권 침해는 전혀 별개라는 입장이다.

이 의원실 관계자는 "규제영향평가는 법안을 발의할 때가 아니라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심사할 때 예산정책처, 입법조사처, 법제실 등에 이 법안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을 요구하는 것으로, 법안 발의 위축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도 최근 토론회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규제를 혁파하고 의원입법으로 신설되는 규제도 규제영향평가를 받도록 규제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문제는 4월 임시국회에서 이 법안이 처리되지 못할 경우 논의는 9월 정기국회 이후로 미뤄질 것이라는 점이다. 5월이 되면 하반기 원 구성으로 운영위 법안소위 위원이 전원 교체되기 때문에 6월 임시국회 때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심층적인 법안심사가 어렵다. 운영위 소위는 아직 추가적인 의사일정을 잡지 않은 상태다.


■이달 불발 시 9월 이후에나…

한편 선진국은 사실상 규제영향평가를 시행하는 사례가 있다. 미국의 경우 의회에서 규제법안이 제정되면 행정부에서 관리예산처 심사를 거쳐 규제 최종안을 작성, 의회가 이를 심사해 승인 여부를 결정토록 하는 방식으로 규제영향평가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영국 역시 정부가 법안을 반대할 경우 의회 산하 독립위원회인 규제정책위원회(RPC)에서 규제영향평가서를 심사하되 규제영향평가서에는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규제들은 반드시 검토조항에 포함하고 가능하면 일몰조항도 넣도록 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이두영 부장 김기석 전용기 최경환 김학재 김미희 예병정 박소현 이승환 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