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우리의 문제는 정치에 답이 있다] (3·⑦) 커피 한잔 마실 시간에 법안 80여건 처리

박소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8.19 17:22

수정 2014.10.23 23:31

[우리의 문제는 정치에 답이 있다] (3·⑦) 커피 한잔 마실 시간에 법안 80여건 처리

#. 지난 5월 2일 금요일 오후 10시30분. 4월 임시국회를 파행 직전으로 몰고 간 기초연금법 제정안이 본회의에 상정됐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가 기초연금법 제정안 처리를 결정하고 소관 상임위인 보건복지위원회에 기초연금법을 상정한 지 6시간 만이다. 40여분 뒤 기초연금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뒤 대기하고 있던 80여건의 민생법안은 일사천리로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국회가 회기 마지막 날에 임박해 법안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입법 벼락치기'는 일상이 됐다.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 '도덕적 타락'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가장 신성한 권한인 입법권을 팽개치고 국회를 비우거나, 입법권을 빙자해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행태야말로 가장 큰 도덕적 타락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19대 국회 들어서 쟁점 법안 1~2건에 나머지 법안 100여건이 발 묶여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선거용으로 발의한 법안들은 1회용으로 전락, 금세 폐기처분되는 등 입법권의 오남용도 심각한 상황이다.

■회기마다 '입법 벼락치기'

19일 정치권에 따르면 7월 임시국회 회기 마지막 날인 8월 19일 오전, 본회의에 계류 중인 법안은 93건으로 집계됐다. 지난 4월 임시국회가 끝난 이후 6·4 지방선거, 새누리당 전당대회, 7·30 재·보선 등 선거 이벤트를 잇따라 치르는 동안 본회의가 열리지 않아 차곡차곡 쌓인 법안이다.

세월호 특별법 협상이 공전을 거듭하는 동안 세월호 특별법과 법안 93건을 분리해서 처리할지 연계해서 처리할지를 두고서도 여야는 입씨름을 벌였다. 새누리당은 93건의 법안은 민생·경제 법안으로 세월호 특별법과 분리 처리할 것을 주장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 특별법도 민생법안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93건 법안과 함께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여야가 이같이 쟁점 법안 하나를 두고 국회 파행을 불사한 채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일은 거의 매 회기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 4월 임시국회에서는 기초연금법, 지난 3월 임시국회는 원자력방호방재법(핵방호법),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는 방송공정성 법안이 '블랙홀'이 돼 최대 수백개의 법안 처리를 가로막았다.

지난해 12월 31일 2014년도 새해 예산안의 연내 처리를 마지막까지 붙든 법안의 주인공은 외국인투자촉진법이었다. 여야 예결특위 간사는 총 356조원 규모의 예산안 처리를 31일이 되기 전에 일찌감치 합의했지만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외촉법을 특정 대기업 혜택법으로 규정, 처리 불가를 선언했다. 여야 지도부의 물밑 회동이 하루 종일 이어지고 민주당 지도부는 의원총회를 열어 외촉법 통과를 위한 당내 설득 작업에 나섰다. 외촉법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통과돼 법사위로 넘어간 시간은 12월 31일 오후 11시58분. 새해 예산안은 결국 해를 넘긴 2014년 1월 1일 오전 5시17분에야 본회의에서 의결됐다. 전날 열린 본회의는 24시간을 넘기는 불명예를 남겼다. 국회가 쟁점 법안 하나를 두고 꽉 막힐 때마다 협상 테이블에 나서는 새누리당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는 "벼랑 끝 전술을 통해서 입법상 목적을 취하려는 그런 시도는 이제 그만 둘 시점"이라고 토로했다.

■입법 계획은 선거 때만 반짝

국회가 입법권을 외면하다 적극적으로 이용할 때는 바로 선거철이다.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앞다퉈 내놓은 선심성 공약은 입법 또는 예산이 뒷받침되는 일인데 일단 추락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수단으로 남발되고 있다.

대표적인 입법이 6·4 지방선거를 두 달도 채 남겨놓지 않고 일어난 세월호 참사 이후 나온 후속 조치들이다. 세월호 특별법, 유병언법, 김영란법 등 박근혜 대통령이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처리를 약속했던 법안 가운데 현재 입법에 성공한 법안은 단 한 건도 없다.

세월호 특별법은 6·4 지방선거를 훌쩍 넘어 7·30 재·보선 전까지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다 8월로 넘어오면서 국회를 파국 직전까지 몰아넣고 있다. 여야는 7·30 재·보선 직전에는 협상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꾸렸지만 TF는 이견을 좁히지 못해 항복 선언을 하고 협상을 여야 원내대표 선으로 올렸다.

여야 원내대표는 지난 7일 세월호 특별법 처리에 극적 합의를 이끌어낸듯 했으나 7·30 재·보선 참패 이후 당내 상황이 꼬인 새정치연합 쪽에서 합의를 번복하며 진퇴양난에 빠졌다. 여야는 또 7·30 재·보선 이전에 여론을 의식해 세월호 사고의 진상규명보다 배상·보상 기준에 초점을 맞춰 논의하다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자 서둘러 진상규명으로 초점을 돌리기도 했다.

유병언법, 김영란법 등은 벌써 잊힌 법이 됐다. 정치권이 세월호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서 진행하는 기관보고, 세월호 특별법 협상 등을 거치며 이슈의 중심에 있는 동안 유병언법, 김영란법은 법 세부 쟁점 사항에 대한 이견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캐비닛 속에 들어 앉았다. 한창 김영란법 원안 통과 여부를 놓고 공방을 벌이던 국회 정무위원회는 법안소위원회를 두 달 째 구성하지 못하며 김영란법 논의를 원점부터 시작해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

한국매니페스토운동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은 "미국은 9·11 테러 이후로 모든 행정시스템 자체가 변했다"면서 "세월호 사고도 생명이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다고 깨닫는 사회변혁의 터닝포인트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원 자성·소위원회 심사 강화 필요

전문가들은 국회의원의 수많은 권한 중 특히 입법권을 오남용하는 것은 가장 부도덕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런 행태는 결국 부실 입법으로 이어져 민생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법권을 제대로 행사하도록 제도적으로 제어하기는 쉽지 않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김민전 교수는 "제도가 바뀌어도 정치인들의 행태가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결국 의원들의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면서 "평상시에 성실하게 심사를 하지 않으면 부실 입법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법은 개정이 잦은데 이는 곧 법의 안정성이 흔들린다는 것"이라면서 "정치 싸움만 하지말고 평상시에 입법을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올바른 입법권 사용과 궁극적인 입법권 강화를 위해 소위원회에 실질적인 심사 권한을 줘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사무총장은 "소위원회가 토론해도 여야 원내대표가 만나서 주고받기식 통과를 반복하면 나중에는 자기네들이 뭘 통과시켰는지도 모르고 정신없는 와중에 소위 '끼워넣기 법안'도 생긴다"면서 "소위원회 활동을 강화하는 동시에 입법과정이 투명하고 절차가 정상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이두영 부장 김기석 전용기 최경환 김학재 김미희 예병정 박소현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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