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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아시나요] 1994년 포항방사광가속기 완공

이재원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01.01 18:08

수정 2014.11.07 16:32



1994년 12월 7일. ‘꿈의 빛’ 방사광(放射光)을 만드는 ‘포항방사광가속기’가 준공된 날이다. 우리 기술진의 손으로 완성된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국가공동연구시설로도 자연스럽게 등극했다. 당시 포항방사광가속기처럼 다양한 빛을 만드는 ‘제3세대형’ 보유국은 EU(유럽연합)·미국·이탈리아·대만 등 4개국에 불과해 우리나라는 5번째 ‘제3세대형 방사광가속기’ 보유국이 됐다.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여 다양한 파장과 광도의 빛을 생산하는 ‘빛 공장’이다. 이 빛을 활용하면 일반 현미경으로는 볼 수 없는 미세한 세포와 금속물질의 움직임과 표면구조, 분자구조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방사광가속기는 수천억 원의 경제 효과를 내는 ‘황금알’이라고 불린다.


삼성전자의 휴대폰 신화도 방사광사속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1999년 삼성전자는 휴대폰의 높은 불량률 때문에 고민하다 가속기연구소를 찾아와 ‘휴대폰 비파괴검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반도체 소자 기준축의 뒤틀림 현상과 납땜 불순물을 찾아냈고 소자 불량률을 70%에서 10%로 낮췄다.

포항방사광가속기 역사는 포항공과대학교 설립과 함께 한다. 1980년대 후반 포항제철(현 포스코) 박태준 회장은 포항공대의 학장을 섭외하던 중 김호길 당시 연암공전 학장을 어렵게 만나게 된다. 김 학장은 이 자리에서 “나는 대학 총장보다 가속기연구소 소장이 되는 것이 꿈이다”라고 말했다.

방사광가속기가 과학기술발전의 필수 장비라는 사실을 알게된 박 회장은 김 학장에게 “포항공대를 성공적으로 개교하면 이 연구소를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포항공대가 첫 신입생을 모집한 1986년 김 학장은 우수 학생 유치에 성공하고 박 회장은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방사광가속기연구소 설립의 두 주역은 1994년 12월 7일 개최된 완공식에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했다.
김 학장은 그 해 4월 학교 체육대회에서 운동중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고 박 회장은 정치적인 이유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탄생한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연간 2000여명의 국내외 과학자들이 이용하는 등 기초 및 응용연구 분야에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차세대 리튬 2차전지 음극 신물질 개발 △세계 최초 반도체 표면 분자 이식 기술 △네이처 커버스토리를 장식한 비아그라 기작원리와 B-Z DNA 구조 규명 등이 바로 포항방사광가속기의 자랑이다.

/economist@fnnews.com 이재원기자

■사진설명=우리나라 기초과학의 산실인 포항방사광가속기의 빔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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