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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창조하는 과학기술 리더들] “과학의 본질은 인류 기여.. 국가가 나서 노벨상 집착하면 안돼”

양형욱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4.27 16:51

수정 2014.10.28 03:22

[미래 창조하는 과학기술 리더들] “과학의 본질은 인류 기여.. 국가가 나서 노벨상 집착하면 안돼”

작은 검은색 여행 가방 하나를 손에 쥔 노교수가 평범한 체크무늬 남방과 캐주얼 바지 차림으로 약속장소에 등장했다. 소탈해보였다. 스스럼없이 악수를 청하는 손끝에선 격식과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건네받은 명함은 투명 아스테이지 재질에 그저 '마이클 베리'란 이름과 '물리학자'란 직함만 새겨져 있어 소박함이 녹아났다. 굳게 다문 입술과 낮은 음성은 냉철함이 배어났다. 식사도 나오기 전 젓가락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는 행동에선 순수함도 엿보였다.

영국 출신 영화배우 숀 코네리를 연상케 하는 흰 수염 가득한 얼굴에선 73세 물리학자의 연륜이 촘촘히 묻어났다. 입가에 머금은 엷은 미소는 런던 템스강변에서 산책하다가 마주칠 법한 마음씨 좋은 노신사의 그것과 닮아 있다. 안경 너머 벽안의 눈동자엔 과학 탐구에 대한 열정이 강하게 빛나고 있다. 영국 출신 세계적인 물리학자 마이클 빅터 베리 경(브리스톨대학교 교수)의 첫인상이다.

베리 경은 지난 22일 고등과학원과 한국물리학회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베리 경은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영국의 국민과학자다. 그는 지난 2009년 톰슨 로이터사에서 발표한 노벨물리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첫마디는 온 국민이 슬픔에 빠진 세월호 사건에 대한 심경이다. 그는 "세월호 침몰 사건은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라며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어 베리 경은 자신의 과학적 발견인 '베리 위상'(기하학적 위상)이 양자컴퓨터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는 현상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베리 위상은 광학분야나 양자컴퓨터 등에 응용되고 있다"며 "베리 위상을 이용해 양자적인 성질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하면서 양자컴퓨터를 개발하려는 시도들이 있다"고 말했다. 베리 경은 "훌륭한 과학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열린 과학철학을 역설했다. 즉, 일반인들에게 과학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깊은 관심 속에서 원리를 이해하면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게 베리 경의 주장이다.

베리 경은 21세기 최고의 과학기술분야 발견으로 꼽히는 '양자역학'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그는 "21세기는 양자역학의 시대라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전세계적으로 산업화된 나라 경제의 30%는 양자역학이 들어갈 정도로 적용되는 분야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반도체를 비롯해 마이크로프로세서, 자기공명영상(MRI), 휴대폰, 컴퓨터 등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베리 경은 한국의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해 "영국과 미국도 한때 그런 현상이 있었지만 최근에 다시 과학분야로 관심이 돌아오고 있다"면서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리 경은 한국의 노벨상 수상과 관련, "국가 차원에서 노벨상에 관심을 두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과학적 시각"이라면서 국가 차원에서의 노벨상 수상 노력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그는 이어 "과학이란 게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쌓아온 성과를 바탕으로 좀 더 진보된 성과를 이뤄내는 것"이라며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도 혼자 모든 걸 이뤄낸 게 아니기 때문에 국내외 과학자 간 열린 소통과 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학의 본질은 인류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베리 경을 23일 서울 세종대로 서울파이낸스센터에서 만나 1시간여 동안 대담을 나눴다.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여객선이 안전하지 않은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여객선이 여전히 운행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30년전 영국에서도 비슷한 여객선 사고가 있었다. 영국에 사는 나의 삼촌도 실제로 여객선에 타고 있다가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생존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한국에 방문한 목적과 일정은 어떻게 되나.

▲22일 서울에서 물리학자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다. 24일에는 대전 컨벤션센터에서 한국물리학회 봄 학술논문 발표회에 참가했다. 이 발표에서는 2개 기조강연이 있었다. 국내 1명과 해외 1명이 했다. 그중 해외 강연자로 나섰다. 25일에는 고등과학원에서 문화강좌를 했다. 이 자리에는 일반인들도 참여해 과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한국의 첫인상은.

▲한국엔 처음 방문했다. 모든 게 흥미롭다. 특히 역동적이란 생각이 든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다가 보이는 섬에 공항이 들어서 있는 게 신기했다. 공항에서 곧바로 지하철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연결돼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기사 작위를 받았는데, 의미는.

▲영국 정부가 물리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옛날에 비해 물리학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졌다. 작위는 물리학 안에서 중요한 일을 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훈장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경우에 따라서 정부 위원회와 같은 곳에서 정책에 관여할 기회도 주어진다. 개인적으론 정부 정책에 관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정책 참여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학문연구와 강의에 몰두했다.

―물리학은 어렵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어떻게 하면 물리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단순히 물리학만 어려운 게 아니다. 축구와 크리켓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물리학이 어렵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물리학은 오래된 학문이다. 일반인이 직접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없는 영역에서의 현상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어렵게 느끼는 것 같다. 게다가 수학적 배경이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 어렵지만 관심만 있으면 흥미를 느낄 수 있다. 예컨대 음악회에 가서 바흐 음악을 들을 때 바흐에 대한 구체적인 상식을 몰라도 음악을 들으면 좋은 원리다. 과학도 즐길 수 있는 게 있다. 영국 BBC도 TV에서 일반 대중을 위한 과학적 프로그램이 많이 방영된다. 그런 게 필요한 것 같다.

―'베리 위상'이 뭔가.

▲현상 자체는 파동이 있을 때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양자역학에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규명했다. 이를 '기하학적 위상'이란 이름을 붙였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베리 위상'이라고 불렀다. 굉장히 일반적인 현상에 해당한다. 지난 1980년 초에 베리 위상을 발견했을 때는 여러 분야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 못했다. 그러나 현재는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본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 때 그 변화가 일어난 후까지 과정을 따라가면 원래와 결과가 차이 난다. 그게 어떤 경로로 왔는가를 보여준다고 보면 된다. 아주 수학적이다. 요즘은 다양한 분야에서 발견돼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베리 위상은 광학분야에서 응용돼 많은 실험을 하고 있다. 레이저나 광케이블 분야에서 실험을 많이 한다. 특히 광스위치란 기기에서 이 현상을 사용한다. 양자컴퓨터에도 적용된다. 사실 양자적인 기기를 만드는 게 힘들다. 양자적인 성질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양자컴퓨터라도 기억된 자료가 1초 만에 없어지면 소용없다. '베리 위상'을 적용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양자컴퓨터 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병렬 주차를 할 때도 나타난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데도 약간씩 위치가 이동한다. 이런 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는 간단한 수학에 해당된다.

―21세기는 양자역학의 시대라는 말이 있다. 양자역학이 중요한 이유는 뭔가.

▲산업화된 나라 경제의 30%는 양자역학이 들어간다. 그만큼 양자역학이 적용되는 분야가 많다. 특히 반도체나 레이저가 양자역학에 의해 구동된다. 우리 사회에서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반도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이크로프로세서도 마찬가지다. 이뿐 아니라 MRI, 휴대폰, 컴퓨터 등 다양한 산업분야에 양자역학이 들어간다.

―한국에는 아직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 노벨상이 과학연구의 목적은 아니지만 노벨상에 대한 열망이 높다. 어떻게 생각하나.

▲국가 차원에서 노벨상에 관심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굉장히 건강하지 못한 과학적 시각이다. 과학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진행한 연구성과에 이어서 누군가가 연계된 연구를 결과물로 표출하는 방식이다. 과학은 아무도 없이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다. 천재가 혼자서 모두 이뤄낸 게 아니다. 나름대로 그 배경들이 있다. 일반 기업과 달리, 국내외 과학자들은 열린 자세로 서로 대화를 한다. 최소한 과학분야에서는 열린 소통을 한다. 이를 통해 놀라운 연구성과를 내는 것이다.

―지난 2009년 노벨상 후보에 올랐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노벨상은 공개되지 않는다. 외부 사람들은 노벨상 후보라고 얘기를 했다. 후보에 올라간 것은 소문에 불과하다. 내가 후보에 올랐는지 몰랐다.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 느낌이다.

―한국에는 이공계 기피현상이 있다. 한국 젊은 학생들이 전문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한때 영국과 미국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다시 반대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 물리학 대학원 진학률이 10년 사이 3배로 올랐다. 과학에서 관심이 떠났던 것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이런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영국의 경우 과학자나 수학자 등을 하다가 정부에서 인재가 필요하면 가서 일한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열린 시스템이 필요해 보인다.

―한국 정부는 올해 해외 상위 1%급 석학들을 영입하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대학에서 강의나 연구를 하실 생각이 있나.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 해외 여행을 짧게 잡아서 가는 편이다. 길게 해외에 머무는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 한국에 길게 머무르면서 대학 강의를 할 생각은 아직 없다. 이번에 한국에 처음 온 것도 같은 이유다.

―과학의 본질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과학이 없이는 현대 사회가 존재할 수 없다.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70억명 정도 된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이유는 과학이 있어서다. 농업에 과학이 적용되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이다. 과학이 들어가면서 효율이 높아졌다. 반도체도 좋은 예다. 반도체는 1950년대에 나왔다. 과학기술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왔다. 앞으로도 과학기술은 사회발전과 변화를 주도할 전망이다.

[미래 창조하는 과학기술 리더들] “과학의 본질은 인류 기여.. 국가가 나서 노벨상 집착하면 안돼”


■마이클 빅터 베리 경은

마이클 빅터 베리 경은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물리학자다.

그는 영국 브리스톨 대학교 물리학 교수이자, 영국의 국민 과학자로 불린다.

베리 경은 과학분야 업적을 인정받아 지난 1996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가 기사작위를 받은 날은 영국 여왕의 생일이었다.

그는 지난 2009년 톰슨 로이터사에서 발표한 노벨물리학상 후보에 올랐고 지난 1982년 영국 런던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됐다. 지난 2006년부터는 왕립학회보의 편집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지난 1965년 영국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시작해 현재까지도 이 학교에서 물리학 명예교수로 재직하는 등 브리스톨 대학에 대한 애정과 함께 물리학자로서의 뜨거운 열정을 연구에 쏟고 있다.

특히 마이클 베리 경은 기하학적 위상(양자역학과 광학의 현상)인 '베리위상'을 발견했다. 이는 그가 준고전물리학을 양자역학의 파동현상과 광학에 응용한 결과다.

이그노벨상, 노르웨이 공과대학교 온사거 메달, 런던수학회 폴리야상, 영국 브리스톨대 총장 메달, 미국 물리교직원연합 리히트미어 기념강의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다.

hwyang@fnnews.com 양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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