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12월 한 남성이 8살 여자아이를 데리고 경기도 안산시 어느 교회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남자는 만취상태였다. 화장실로 들어온 남자는 아이를 바닥에 눕히고 강제로 성폭행했다. 결국 아이는 인공항문으로 살아야 하는 상처를 입고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했다.
검찰은 잔인한 성폭행을 저지른 이 남성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하지만 법원은 남성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술을 마신 성범죄자들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관대한 편이다. 2008년 서울중앙지방법원 성폭력 사건 유죄판결문 49건 중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을 감경사유로 삼은 사건은 20건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가해자가 술을 마셨는데 이를 감경사유로 보지 않은 사례는 단 1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술 핑계를 들고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술 취한 성범죄자들에 대한 이 같은 관대한 판결은 성범죄자들의 재범을 유도할 수 있다. 알콜치료센터 진병원 정신과의 하종은 과장은 “술에 취해 문제를 일으켜도 형을 감경해 주고 별 문제되는게 없다는 걸 학습하게 되면 반복해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신질환도 성범죄자들에겐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지난 7월 김미영씨(가명)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서울 논현동 술집 ‘ㅁ포차’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한 괴한이 문을 뛰어넘어 들어와 성폭행을 시도한 것이다. 위기의 순간 김씨는 다행히 주위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고 괴한은 잡혀 김씨와 함께 경찰서로 향하게 됐다.
경찰서에 간 김씨와 김씨의 친구들은 더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됐다. ‘소리 지르면 죽이겠다’며 멀쩡하게 피해자를 협박하던 괴한이 갑자기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며 주장하고 나온 것. 현장에 함께 있었던 김씨의 지인은 “정신질환인 사람이 멀쩡히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납득이 안간다”며 “정신질환을 주장하고 나오자 경찰의 태도도 바뀌는 것을 느꼈다”고 전했다.
지난해 여중생을 성폭행 후 살해한 김길태 역시 재판과정에서 정신장애로 인한 심신장애를 주장했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길태에게 부산고등법원은 “법률상 심신미약의 상태는 아니라도 정상인과 같은 온전한 정신 상태였다고 쉽사리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결국 김길태는 대법원에서도 무기징역을 받아 사형을 면하게 됐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관련 단체가 법개정을 요구하고 비판여론이 일자 일부 법이 개정되기도 했다. 지난 해 4월엔 새로운 조항이 신설됐다. 이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 19조로 성범죄의 경우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성범죄의 경우엔 심신장애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형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불완전하다는게 전문가들의 목소리다. 결국 판사의 판단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범행시기가 수 일이 지난 다음 범행 당시 가해자가 심신장애로 볼 수 있을 만큼 음주상태였는지 구체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법무부의 한 관계자는 “특례법 제 19조는 심신장애 상태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 100%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전했다.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