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쓰릴 미’ 류정한 “팬들에 작은 콘서트”

박하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7.04.19 17:10

수정 2014.11.13 13:05



“늦어서 죄송합니다.”

깜짝 놀랐다. 살짝 미소지으며 들어오는 청바지 차림의 배우 류정한. 무대에서 봤던 날카로운 눈빛과 고집스러운 입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은은한 갈색 뿔테를 끼고 있어서인지 ‘류정한 맞나’ 싶을만큼 낯설기도 했다.

“이 안경이 요즘 공연중인 ‘쓰릴미’에서 쓰는 소품이에요. 이걸 끼고 있으면 일상생활 중에도 극 중의 ‘나’가 된 것 같거든요.”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덧붙이는 걸 보면 소탈한 구석도 있었다. ‘오페라의 유령’이나 ‘지킬 앤 하이드’처럼 ‘비싼 공연’ 전문배우였던 그가 지금은 실험적 성격이 강한 소극장 뮤지컬 ‘쓰릴미’에서 어린이 살해범으로 열연중이다.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엔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탓에 냉소적이라는 핀잔을 종종 들었지만 이젠 동료들에게 살갑게 굴 때가 많다. 주위 사람들도 ‘함께 일하는게 훨씬 편해졌다’고 말할 정도다.

■데뷔 10년 맞아 ‘작은 콘서트’ 기획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로 뮤지컬계에 첫 발을 디딘게 1997년이다. 10년이 다됐다. 당시 어지간한 스포츠신문과 일간지 공연면을 도배하다시피 하며 등장했던 그는 그 화려함이 계속 갈줄 알았다. 그러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이후 이렇다할 활동이 없자 슬럼프에 빠졌다. 붙임성 없는 성격을 탓하기도 하고 성악과 출신이라 연기력이 부족한 게 아닐까 자책도 했다. 유학을 핑계삼아 미국으로 달아날 궁리도 했다.

그런 그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오페라의 유령’의 귀족 청년 라울 역이다. 당초 그는 주인공인 팬텀을 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번번히 돌아온 것은 ‘라울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팬텀 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돌린 것은 한 연출자의 조언이다. “팬텀은 나이가 든 뒤에도 할 수 있지만 청년 라울 역을 맡은 기회는 지금뿐이야.” 결국 고래힘줄같던 고집은 누그러졌고 라울역은 그에게 제2의 전성기를 가져다 주었다.

“아직도 기억나요. 그때가 2002년 월드컵 때였거든요. 모든 공연들이 된서리를 맞았죠.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만큼은 유료 객석 점유율이 98%일만큼 인기가 많았어요.”

무대에 선 그가 당시 본 것은 어두컴컴한 객석에서 군데 군데 빛나는 휴대폰 불빛. 한국팀의 16강 진출 여부가 궁금했던 관객들은 공연 짬짬이 휴대폰으로 경기 결과를 보고 있었다. 다른때라면 서운한 기분이 들었을텐데 그때만큼은 그 불빛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단다.

“한번은 발목을 삐어 공연을 하지 못할 위기가 오기도 했어요. 강한 진통제를 맞고 무대에 서니 너무 몽롱한거에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공연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객석을 보니 팬클럽 분들이 옷을 맞춰입고 응원하러 오셨더라구요. 그 모습에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어요.”

이 두번의 경험은 무던하기만 했던 그에게 팬들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언젠가 보답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올해 그 다짐을 실천할 생각이다.

“데뷔 10년을 기념해 작은 콘서트를 열 거에요. 팬클럽 회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부르는 게 꿈이죠. 아름다운 시와 제 노래가 함께 하는 근사한 추억을 선물로 드리려구요.”

■클래식 공연 제작자로 변신하고파

대학에 간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방황했던 삼수생 시절, 류정한은 막연하게 경영학도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목청이 좋으니 성악과에 지원해보라는 주위의 권유에 덜컥 진로를 바꾸었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사람마다 제 갈길은 따로 있나보다. 성악도가 된 후엔 정통 클래식에 매료됐다. 상업예술로 분류되는 뮤지컬을 하면서도 종종 클래식으로의 회귀를 꿈꾼다. 데뷔 초부터 그는 공공연하게 ‘나이가 들면 성악가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고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30대까지는 뮤지컬배우, 40대엔 공연 제작자로 활동하겠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그는 요즘 주위사람들에게 “이제 뮤지컬을 할 날도 3,4년밖에 남지 않았어”라고 농담을 한다.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일까.

“뮤지컬이 됐건 정통 클래식 공연이 됐건 제 손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제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있으면 배우로도 뛸 거구요. 기회가 된다면 직접 부른 클래식 음반도 낼거구요. ”

사업가가 됐건 성악가가 됐건 팬들은 그의 화려한 변신을 기대한다.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 수많은 작품이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뮤지컬 배우로 사랑받기 위해선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그는 ‘성악 전공 뮤지컬 배우’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가창력’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연극들 몇 편만 봐도 소름이 돋치도록 연기 잘하는 선배들 참 많아요. 연기로만 승부하려면 연극을 해야죠. 뮤지컬 배우는 일단 노래를 잘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입을 꼭 다무는데 무대서나 보여줬던 도도한 표정이 언뜻 비친다.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저 고집. 그게 있어서 류정한 아닌가.

/wil@fnnews.com 박하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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