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나루] 연필로 쓰여진 판결문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4.17 17:08

수정 2014.10.28 06:40

[여의나루] 연필로 쓰여진 판결문

'사랑은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

가수 전영록의 노래다. 최근 사법부의 판결들이 그 노래에 딱 맞아떨어진다. 황제노역 판결 후 여론에 따라 물의가 빚어지니 잘못된 판결임을 그제서야 느끼고 집행 방식이 바뀌고 재수사하고…. 계모들이 유아들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돌려도, 갈비뼈가 16개나 부러져도 고의적인 살인 의도가 없기에 사형을 시킬 수 없다고 한다. 범국민적 공분으로 볼 때 남은 재판의 판결은 달라질 것으로 본다. '판결은 판결은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식의 판결문인 셈이다.

사형급의 엽기적 아동학대에도 관대하게, 큰 죄질이면서도 집행유예라는 특혜로 절대로 수감생활을 시키지 않고 석방을 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감동(?)에 가깝다.
이렇게 유전무죄에 일괄적인 판결이라면 굳이 판결의 난이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징 3 유 5라고 재벌 피고 스스로가 판결하고 판사에게 방망이를 쳐달라고 말해도 되는 정도다. 뭐 수사도 필요 없다. 법전이 두꺼운 것은 죄질의 종류에 따라 구체적으로 형량이 나뉘어 있기 때문인데 마치 모세의 '십계명'처럼 유방의 '약법삼장'처럼 일괄적 판결이 내려진다. 이 정도로 판결이 쉽고 또 국민여론에 좌지우지돼 번복된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국민 모두가 다 판사 자격이 있듯이 전문성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해병대 훈련장 입구에 '누구나 다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해병에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문구는 해병이 되기 위한 힘든 훈련을 참고 이겨내는 것은 물론 국토방위의 확고한 정신력이 남다르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해병대에 첫발을 들여놓는 사병의 경우도 이러한 마음가짐 일진대…. 국가의 도덕과 기강을 책임져야 할 법관의 자격이 국민이면 누구나 다 판사가 될 수 있다니…. 법관은 숭고한 직을 수행해야 하기에 충분한 사회적 예우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원칙의 공평성과 법적용의 창의성 등의 도덕적 전문성을 가지라는 뜻이다. '공평한 저울'을 들고 있는 여신의 조각상이 법원의 상징인데 작금의 그 여신상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무게의 숫자만 표시되는 전자식 디지털 계측기에 너무 익숙해 저울이 갖는 의미가 많이 잊혀진 것은 아닐까?

국가에 기여한 경제적 공로를 인정해 이쯤에서 끝낸다. 고의적 직접살인은 아니니 이 정도 형량이면 돼! 라고들 판결했지만 그 친절한(?) 배려가 역시 모든 서민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재판과정에서 해당 죄와 상관없는 그 피고의 평상시 선행과 업적까지 증명하는가? 그렇게 친절 공손하며 따뜻한 법정인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서민을 보호하는 판결이 나온다. '계약서대로 살을 베어내되 피는 한 방울도 흘리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친모 주장의 두 엄마에게 '아이를 칼로 양분해 반씩 나눠 가지라'고 솔로몬 왕은 판결한다. 이 두 가지의 판결은 최근 유행하는 '갑(甲)'에 대해 응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갑의 상징 경제인 샤일록을 벌한 것이며 억울하지만 자식이 칼로 양분되길 원하지 않는 친모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갈릴레오는 재판이 끝난후 '그래도 지구는 돈다'며 재판부를 비웃는다. 재판부가 갑이라는 강자이기에 비록 무릎은 꿇지만 속으로 불만을 갖게 하는 을(乙)을 만들어선 안 된다. 세상에는 갑과 을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병(丙)도 있고 정(丁)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 판결에 대한 최종 재판은 계속된다.

이제는 '을 병 정…'이 거꾸로 재판부가 돼 갑의 판결을 심사하는 것이다.


무섭지도 않은가? 판결문은 지우개로 얼마든지 지울 수 있는 연필로 쓰지 말고 '원칙의 잉크'로 채워진 '정의의 만년필'로 쓰이길 앙망한다.

강형구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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