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환형유치(換刑留置)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4.17 17:09

수정 2014.10.28 06:40

[fn논단] 환형유치(換刑留置)

청년 시절 '죄(罪)와 벌(罰)'이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명작을 읽은 적이 있다. 너무 방대한 작품이라서 완독하는데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특히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의 심리묘사가 치밀하고 실감이 나서 도스토옙스키의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 대해 감명을 받은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그 책을 읽은 지가 수십 년이 지나 내용이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죄와 벌'이라는 제목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명료하게 남아 있고 그 후 법률을 공부하게 되면서 죄(Crime)와 벌(Punishment)이 법철학의 주요 명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죄가 있으면 벌이 있어야 한다.
죄는 사회규범의 위반이고 벌은 그 위반행위에 대한 응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벌은 죄에 상응해야 한다. 무거운 죄에는 무거운 벌이 내려져야 하고 가벼운 죄에는 가벼운 벌이 내려져야 한다. 가장 무거운 벌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생명형(사형)이고 그다음은 사람의 신체적 자유를 박탈하는 자유형(징역·금고·구류)이다. 그리고 일정한 재산을 박탈하는 벌금형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벌금형은 자유형보다 가벼운 벌이라고 인식돼 있다. 교도소에 구속돼 있는 것보다 벌금을 내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러한 인식이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 경제법 위반 사범에 대해 벌금 액수가 수십억원을 넘어 수백억원이 선고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거액의 벌금을 내느니 일정 기간 노역장에 유치돼 취역을 하겠다고 자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벌금을 내지 않는 경우 하루의 노역을 돈으로 환산해 벌금액을 나눈 날수를 노역장 유치기간으로 정하는데 이것을 환형유치(換刑留置)라고 한다.

요즘 '황제노역'이 세간의 화제다. 지방의 법원이 기업의 대주주에게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하루의 노역을 수억원으로 환산한 환형유치를 했고 그 지방 부호는 벌금을 내지 않고 노역장에 유치돼 취역을 하겠다고 자원한 것이다. 하루에 수억원의 벌금을 내는 효과를 누린다면 많은 사람이 노역장 유치를 택할 것 같다.

필자가 법원에 재임하던 시절에는 환형유치는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형사판결 주문의 장식품처럼 붙어 있었다. 검찰청에서 벌금을 징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환형유치가 집행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기업인들이 거액의 벌금을 내느니 차라리 노역장에 가서 취역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판이다.

벌금형은 자유형보다 가벼운 형이라는 인식이 바뀌어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신체의 자유보다 돈이 더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고 노역장에 유치된다는 불명예보다도 돈이 더 귀중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돈의 사회 통제력이 점점 커가고 있는 추세인 것이다.

이른바 황제노역을 선고한 법관들도, 지방 부호인 피고인이 벌금의 납부 대신 노역장의 유치를 선택하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수가 있다. 피고인이 일단 벌금을 납부하면 환형유치의 액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정 밖의 세상은 변해 있었다.
지방의 부호도 거액의 벌금을 납부하느니 차라리 노역장 유치라는 신체의 구속과 불명예를 택했다. 그만큼 돈의 사회 통제력은 커져 있었던 것이다.
법조인의 인식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강신섭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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