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스트리트] 해미의 순교자들

손호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8.17 18:07

수정 2014.10.24 10:06

[fn스트리트] 해미의 순교자들

천주교 신자들을 무차별로 탄압한 조선 후기의 여러 박해 중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단연 병인박해(1866년)였다. 러시아 등 강대국의 접근에서 비롯된 불안을 잠재우고 정적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대원군 시절 정치적 목적으로 자행된 이 박해는 8000여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의 순교자가 100여명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대학살의 광풍이 조선 땅을 휩쓸었던 셈이다.

서해가 내륙 깊숙이 들어왔다 해서 내포(內浦)라 불린 충청도의 서산·당진·보령·홍성·예산 일대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물길 따라 온갖 재화와 외래 문물이 드나든 덕에 천주교를 일찍 받아들인 이곳에 탄압의 칼 끝이 집중되면서 희생자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신자들을 투옥시키던 서산의 해미 진영(해미읍성) 감옥은 인산인해였다.
병인박해 때만 해도 1000여명을 처형했다고 조정에 보고했을 정도였다. 병인박해 수십년 전부터 이 일대에서 천주교 탄압이 계속돼 왔음을 감안하면 희생자 수는 수천명에 이를 수 있는 규모였다.

해미 진영에서 목숨을 잃은 신자는 거의 이름과 출신을 알 수 없는 서민들이었다. 신원이 확실하고 뒤탈이 우려될 만한 신자는 공주·홍성 등 상급 고을로 이송한 반면 힘없는 서민층 신자들만 마구잡이로 처형했기 때문이다. 참수, 몰매는 물론이요 큰 구덩이를 파게 한 후 살아있는 사람들을 밀어넣는 생매장, 꽁꽁 묶은 후 물에 빠뜨리는 수장, 돌다리 위에 패대기치는 자리개질 등 갖가지 악랄한 수법이 동원된 것도 이곳의 특징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쁜 일정을 쪼개 17일 해미순교성지를 찾았다. 이곳 성당 일대는 '여숫골'로 불린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신자들이 '예수마리아'를 끊임없이 외쳤는데 이것이 여수머리를 거쳐 여숫골로 변했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지켜낸 순교자들의 신앙이 지명에도 살아 있는 셈이다. 해미순교성지에서 아시아 주교들과 만난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의 폐막미사를 해미읍성에서 집전했다.
18일 서울 명동성당 미사를 제외한 방한 일정의 마무리다.

교황의 방문 소식이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가면서 해미순교성지는 해미읍성과 함께 해외 매스컴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강조해온 교황의 발길이 무명의 순교자가 유난히 많았던 이곳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해미' 지명은 지구촌 가톨릭 신자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tanuki2656@fnnews.com 양승득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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