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우린 그걸 '그루밍'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뉴스1       2025.10.31 07:49   수정 : 2025.10.31 09:17기사원문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경계선지능인 A 씨의 폭행 피해 사진(왼쪽)과 학대 의혹이 불거진 대안 가정


ⓒ News1 김지영 디자이너


(서울=뉴스1) 신윤하 기자

기자 : "경계선지능인 지원단체 전 대표 A 씨에게 장애인활동지원사도 마사지를 해줬나요?"

지적장애인 B 씨 : "음, 빈번히요."

단체 전 대표 A 씨 : "빈번은 아니야! 두 번?"

지적장애인 B 씨 : "네 가끔씩..."

지난달 29일 뉴스1 취재진은 대안 가정에서 경계선지능인을 홍두깨로 폭행하고 지적장애인·장애인활동지원사 등에게 마사지를 요구했단 의혹이 불거진 A 씨를 만났다. 인터뷰에는 A 씨 뿐만 아니라 대안 가정에 함께 살았던 지적 장애인 2명과, 이 중 한 명의 어머니도 배석했다.

약 3시간 가량의 인터뷰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취재진이 마사지 의혹에 대해서 질문하자 지적 장애인 B 씨가 "빈번히 (마사지했다)"고 대답한 때였다. A 씨는 말을 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이 '빈번히' 마사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라고. 결국 B 씨는 눈치를 보면서 '가끔씩'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외에도 A 씨가 "이 이야기를 해야지"라며 지적장애인들에게 특정 발언을 유도하고, 지적장애인은 눈치를 보는 순간들이 인터뷰 내내 반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인터뷰에 참여한 지적 장애인들은 A 씨에 대해 '감사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지적 장애인 B 씨는 A 씨에게 자진해서 마사지를 했다고 주장하며 "제가 받은 게 많아서 그랬다. 제 신세도 고쳐주시고, 호주머니에 (돈도 없는데) 도와주셨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A 씨는 B 씨의 공공후견인이다.

한편 A 씨의 태도는 지나치게 당당했다. 자신의 언행엔 합리적 이유가 있단 식이었다. 예컨대 취재진이 "왜 경계선지능인에게 '이 머저리를 어떻게 해야 하지'라며 고성을 질렀냐"고 물었을 때도, A 씨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그럴 만한 상황이 있었겠죠."

기자 : 왜 이러셨나요? 예를 들어 저희 팀장이 저한테 '미친 X아' '머저리야' 해도 그건 문제거든요. 누가 아무리 실수를 해도 그런 소리를 듣는 건 문제잖아요.

A 씨 : 모르겠어요.

정말 A 씨는 자신의 행동에 당당했을까. 그는 사회복지사였다. 경계선지능인에게 '머저리' 등의 폭언을 하는 게 부적합하다는 걸 모를 수 없다. 또한 자신이 후견인을 맡은 지적 장애인이나 장애인활동지원사가 정말 '자원해서' 마사지를 해주겠다고 해도, 거절하는 게 당연한 직업윤리다. 특히 그 마사지의 횟수가 빈번했다면 말이다. 피해자들은 마사지가 최대 3시간씩 이어졌고, 거부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루밍 범죄는 통상 이렇게 일어난다. 가해자가 신뢰를 쌓아서 사회적으로 취약한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착취한다. 착취당한 사람조차도 범죄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맞설 생각을 하기 힘드니 가해자는 되레 '이게 무슨 문제냐'며 당당한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특히 A 씨는 경계선지능인 분야에서 입지가 탄탄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맞서기 어려웠다는 게 피해자들의 설명이다. 그가 전 대표직을 거쳐 현재는 이사직을 맡은 지원단체는 국내 최초의 느린학습자 지원단체라며 홍보해 왔다. A 씨는 다수의 국회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그는 몇 개의 시사 TV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안 가정에서 경계선지능인과 취약 청년을 보호하는 '다섯 아이의 아빠'로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허상 위에 쌓아 올린 입지인 것이 드러났다. 단체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저자인 고(故) 조세희 작가가 단체를 설립했다며 '최초의 느린학습자 지원단체'라고 주장해 왔으나, 최근 뉴스1 보도를 통해 조 작가가 해당 단체 설립자가 아니란 점이 밝혀졌다. 조 작가가 설립자라는 언급은 A 씨가 대표를 맡던 시기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혹자는 이토록 허술한 방법으로 어떻게 경계선지능인 분야에서 입지를 쌓을 수 있었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비단 A 씨나 특정 단체,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경계선지능인 학부모는 경계선지능인 분야가 '블루오션'이라고 했다. 법적인 울타리도 없고, 개념조차 한국 사회에 알려진 지가 얼마 안 됐으니, 누구든 깃발만 꽂으면 이렇다 할 관리감독 없이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론적이지만, 그래서 또다시 궁극적인 재발방지 대책은 '법'이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아 그 숫자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실태조사를 의무화하고, 이들을 지원하는 단체 및 시설에 대한 최소한의 조건 등을 법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경계선지능인이 특정 단체나 개인에 기대지 않아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국가의 책임이다. 22대 국회에서 보건복지위원회 및 교육위원회에 발의된 경계선지능인 관련 법은 9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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