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평의 삶' 렌즈에 담고 달방살이 5년…"'사람이 먼저' 배웠죠"

연합뉴스       2025.11.02 07:03   수정 : 2025.11.02 07:03기사원문
여인숙 사진집 낸 이강산 작가…자본의 논리에 소외된 이들의 일상 조명

'1평의 삶' 렌즈에 담고 달방살이 5년…"'사람이 먼저' 배웠죠"

여인숙 사진집 낸 이강산 작가…자본의 논리에 소외된 이들의 일상 조명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1. 당뇨로 오른 다리 정강이 아랫부분을 상실한 권모(74) 씨가 폭염으로 달궈진 여인숙에서 살얼음이 든 물병을 집어 들고 목을 축이고 있다. 곁에는 벗어놓은 의족이 보인다. 1평짜리 방은 잡동사니로 가득해 왼발마저 썩어가는 권씨가 겨우 몸을 누울 수 있을 것 같다.

폭염 속 좁은 여인숙 생활 (출처=연합뉴스)


#2. 한기를 견디다 못한 옥선균(64) 씨가 좁은 여인숙 방에서 휴대용 가스버너의 불을 켜고 손을 녹이고 있다. 6개월 전만 해도 쪽방촌 사무실에서 준 얼음 생수병을 이마에 올려놓고 "북극 한파가 그립다"며 신음하던 그는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강산(67) 작가가 최근 펴낸 사진집 '여인숙·2'(눈빛출판사)에서는 "규모가 작고 값이 싼 여관"이라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만으로는 떠올리기 어려운 장면이 펼쳐진다. 대전에 있는 낡은 여인숙과 그곳에 사는 이들의 일상을 포착한 이 사진집은 아파트 한 채가 250억원에 거래되는 부유한 대한민국의 반대쪽 끝을 보여준다.

250억원에 거래된 '나인원한남' (출처=연합뉴스)


사진집을 보면 인간의 한계를 실험이라도 하듯 더운 여름날 여든이 넘은 노인은 속옷 바람으로 렌즈 앞에 몸을 드러낸다. 폭력을 피해 여인숙에 사는 대구 출신 여인은 홀로 화투를 놓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빗물이 새는 방에서도 사람들은 짜장면 한 그릇에 정을 나눈다. 지팡이에 의족까지 사용해도 십여초 밖에 서지 못하는 권씨는 이마를 벽에 대고 몸의 중심을 잡으며 하나뿐인 숟가락과 밥그릇을 억척스럽게 설거지한다.

2021년 사진집 '여인숙'에서 여인숙의 상징성과 외형을 기록한 이 작가는 '여인숙·2'에서 이른바 달방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조명했다. 전화로 이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짜장면으로 정을 나누는 여인숙 사람들 (출처=연합뉴스)


그가 여인숙을 렌즈에 담기 시작한 것은 2007년 7월이었다. 포항 구룡포의 매월여인숙을 시작으로 강원 정선, 제주까지 전국 80여곳을 돌았다. 하지만 갈수록 공허함은 커졌다.

"다큐멘터리 사진인데 초상권 때문에 가장 중요한 사람을 찍을 수 없었거든요. 기껏해야 뒷모습 정도였죠. 서울 창신동 여인숙에서 한 달 정도 지내기도 했지만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어요."

내부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2020년 7월부터 여인숙에 들어가 살았다. 이 작가가 선택한 곳은 대전역 인근에 있는 50년 넘은 낡은 여인숙이었다. 철거 예정인 건물이라서 냉난방도 안 되는 일대에서 가장 열악한 시설이다. 겨울에는 방에 놓아둔 물병이 얼고 여름에는 찜통더위에 땀이 줄줄 흐르는 곳이다.

비좁은 여인숙에서의 한끼 (출처=연합뉴스)


여인숙에 들어가 살아도 사진을 쉽게 찍을 수는 없었다. 슬쩍 찍었다가 여인숙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고 이 작가는 전했다. 삶을 포기하다시피 한 사람, 가족과 인연을 끊은 여인, 알코올 중독자, 질병과 장애를 안고 있는 극빈층 등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들의 마지막 보루인 그곳의 평온을 깼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외부에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분들이 많아요. 멀쩡한 놈이 와서 카메라를 꺼내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여인숙 생활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던 때를 회고했다.

"아이고 그날 밤에 죽을 뻔했어요. 특정 개인에게 초상권 허락을 받아도 그 옆에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승낙을 안 받으면 안 돼요. 밤에 자고 있는데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된 사람이 '때려죽이겠다'고 방문을 두들겨요. 제가 (그분들의 마음을) 미처 몰랐던 것이죠."

이강산 작가 (출처=연합뉴스)


이 작가는 마음을 비웠다. 장애로 거동이 어렵거나 몸이 아파서 무료 급식소에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손수 끓인 찌개를 나누고, 주민등록이 말소돼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 못한 이들을 위해 함께 주민센터를 찾아갔다. 여인숙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하나둘 해결해주며 친구가 됐다. 그러자 지켜보던 여인숙 관리자가 어느 날 "이 선생(이강산 작가) 좀 도와줘라"고 입을 뗐다.

이 작가의 여인숙 생활은 어느덧 5년째에 접어들었다. 꼬박 3년은 그곳에서 숙식했고 중간에 몸을 다치는 바람에 부인의 걱정을 덜기 위해 지금은 낮에는 여인숙에 머물고 잠은 집에서 자는 출퇴근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만 찍고 나올 수 없어서 아예 여인숙에 머물렀죠. 5년째네요. 지금은 완전히 가족이 됐어요. 그 골목에 사는 사람들이 한 200명 되는데 다 저를 알아요. 삼촌, 형님, 아우라고 부르죠. 지금은 헤어질 수 없어요."

여인숙의 더운 여름날 (출처=연합뉴스)


이제는 여인숙 사람들로부터 사진의 소재가 있다고 먼저 전화가 온다. 혹은 "이 작가 이거는 왜 안 찍어"라고 촬영을 독려하기도 한다. 그래도 당사자의 명예와 인권을 고려해 차마 찍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인숙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생활한다는 것은 셔터 찬스를 뛰어넘는 질문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상황에 대응할 것인가, 촬영을 우선할 것인가. 나는 언제나 이 판단의 순서를 숙고하고 촬영 이후의 책임까지 고민한 뒤 셔터를 누른다" ('여인숙·2' 작가 서문에서)

이 작가가 형이라고 부르던 박승기(68) 씨가 이런 각오를 일깨웠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탈출한 승기 씨는 별 18개(전과 18범)를 달고 24년간 학교(교도소) 생활을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몸에 새긴 문신이 부끄럽다고 가리고 다녔다. 열 여덟살 때 쥐약을 마신 후유증으로 턱뼈가 시큰거리고 이가 없어 가위로 자른 냉면을 틀니로 대충 씹어 겨우 삼킬 정도로 고생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저혈당 쇼크였다. 이 작가는 카메라 대신 전화를 들었다. 승기 씨는 세 번이나 119를 불러준 이 작가에게 "이제 내 목숨은 네 것이다. 다시 쓰러지면 내가 죽어가는 모습 좀 찍어서 보여주라"고 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구급대의 도움을 받는 승기 씨의 모습을 이 작가는 비로소 렌즈에 담을 수 있었다.

'여인숙·2' 사진집 이미지 (출처=연합뉴스)


시간이 흐르며 부인 이영수(57) 씨도 남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됐다. 요양보호사인 이씨는 여인숙을 방문해 거주자의 안부를 확인하거나 목욕 봉사를 하고 떡국을 끓여 대접하기도 한다.

이 작가가 누나로, 부인 영수 씨가 언니라고 부르던 정순자(73) 씨는 2023년 응급실에 실려 간 뒤 결국 세상과 작별했다. 키 149㎝에 27㎏ 정도로 야윈 채 생명이 꺼져가는 순자 씨를 영수 씨가 비좁은 여인숙 세면장에서 울면서 목욕시키는 장면도 당사자들의 동의를 얻어 사진집에 실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순자 씨의 맨몸은 자본의 논리 앞에 소외된 이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준다.

여인숙 거리 풍경 (출처=연합뉴스)


"사회적 소외와 외면의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기록을 통해 인권과 생명의 가치를 환기하고 공존과 상생을 도모함." (이강산 작가의 다큐멘터리 사진 '여인숙' 기획 의도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일이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라며 "초기에는 단순히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인간성의 복원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여인숙 생활 5년에 사람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고 한다.

"여인숙에서 5년을 살면서 인생 공부를 다시 하고 있어요. 사진을 찍고 글을 쓰려고 들어갔는데 그들과 가족처럼 지내면서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제 제가 2∼3일 안 보이면 먼저 안부 전화가 와요. 여인숙에는 전과자도 있고, 인생을 포기한 사람도 있지만 알고 보면 다들 아픈 사연이 있어요"

이 작가는 부인과 함께 여인숙 거주자를 후원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의 소망은 여인숙 철거로 인해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여인숙 사람들의 주거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그들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작가는 출간을 기념해 최근 서울에서 사진전을 열었으며 13∼25일 대전 갤러리 탄(TAN)과 12월 11∼24일 세종 세종갤러리고운에서 전시를 이어간다.

한쪽 다리 잃고 여인숙에 사는 김선일 씨 (출처=연합뉴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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