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작은 학교도 불리하지 않다는 착시

뉴스1       2025.12.07 07:02   수정 : 2025.12.07 07:02기사원문

이정열 부산 정관고 교사/부산교사노조 중등 부위원장


교사노동조합연맹,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지난 5월 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고교학점제 폐지 서명운동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학점제를 시행 중인 서울의 한 고등학교 수업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현행 고교학점제의 심각한 부작용 중 하나는 상대평가 내신 경쟁에 따른 대규모 학교 쏠림, 소규모 학교의 소멸 위기 가속화다. 이러한 점이 언론에서 문제로 지적되자 몇몇에서는 "작은 학교가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권혁선 한국기술부사관고 수석교사의 주장(내신, 학생 수 많은 학교가 무조건 유리할까, 2025.12.3)도 이러한 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해당 내용은 현실에서 충족되기 어려운 조건들을 내세우며 제도를 옹호하고 있어 현장의 어려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고교학점제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내는 지역 격차와 중하위권 학생들의 부담을 간과한 채 상위권만 고려하며 유불리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크다.

그는 학교 연계, 공동교육과정, 온라인 교육과정 활용 등을 통해 소규모 학교도 교육과정을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주로 수도권과 대도시의 상황을 전제로 하는 접근이다. 공동교육과정 개설 과목 수, 이동 시간, 교통 접근성, 온라인 수업 운영 인프라는 지역 간 격차가 매우 크다.

수도권은 인구가 밀집돼 있고 교사 확보가 용이해 개설 폭이 넓지만, 지방·읍면 지역은 현실적인 접근성이 크게 제한된다. 그 결과 공동교육과정은 격차 완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교육 기회 격차를 확대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교육부는 개선 대책으로 시도 간 교차 수강을 도입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는 서울·수도권 중심의 개설 과목 쏠림을 더욱 심화하고 오히려 지역 교육 기반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간과한 채 공동교육과정을 충분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논의는 또한 소규모 학교에서도 1등급 산출이 가능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대규모 학교보다 1등급 비율이 높게 나온다는 일부 데이터를 근거로 내신 유불리를 단순화했다. 그러나 선택과목 개설의 불균형, 이동 수업 증가, 교통 접근성 차이, 4학점 중심 편성으로 인한 세부능력특기사항 기록 격차는 모두 중하위권 학생들에게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과목 선택 단계부터 제약을 경험하며, 평가 기회 차이로 인해 불리한 조건이 누적된다.

이는 고교학점제 논의에서 반복돼 온 문제이기도 하다. 성취도 분포와 지역 환경, 교사 배치, 선택권 불균형 등의 핵심 요소를 생략한 채 '작은 학교도 괜찮다'고 주장하는 것은, '책임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책임이 필요한 학생들을 논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결과를 낳는다.

고교학점제하에서 작은 학교가 불리하지 않다는 주장은 "교사 수가 충분하면 원하는 과목 개설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바탕에 둔다. 그러나 실제 인사 체계, 국가 교원정책의 구조, 지역 교육청의 재정 여력을 고려하면 소규모 학교에 교사를 충분히 배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서울·수도권 역시 교사 배치가 빠듯하며, 특정 지역 정원만 확대하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실제 도입을 기대하기조차 어렵다. 이러한 난점을 고려하지 않는 한, 작은 학교가 불리하지 않다는 판단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유토피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결국 작은 학교가 불리하지 않다는 주장은 상위권 중심의 산술적 계산에 기반한 이상적 담론일 뿐, 실제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복합적 격차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선택과목 개설의 제약, 이동 부담, 지역 간 접근성 차이, 세특 기록 불균형, 중하위권 학생들의 학습 낙폭 확대 등은 앞으로 더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

달성할 수 없는 이상적 조건을 전제로 한 논의는 문제의 본질을 가린다. 교육은 현실에 기반해 설계돼야 한다.
고교학점제는 교육 여건이 지역마다 극명하게 다른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 채 오히려 격차를 더욱 확대하는 구조로 작동하고 있다.

이미 제도 도입을 위해 투입된 매몰 비용을 아까워하며 무리하게 기존 방향을 유지하는 방식은 더 큰 혼란을 초래할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육과정을 현실에 맞게 개편하고, 최소한 지역 격차를 악화시키지는 않는 방향으로 출구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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