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외동읍 석계리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경계에 걸쳐 있는 치술령 꼭대기에 망부석(望夫石)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삽량주(揷良州;지금의 양산)태수 박제상(朴堤上)에게 왜국에 볼모로 잡혀있는 막내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구해 오도록 하명했다.
박제상은 왜국에 가서 본국을 배반하고 온 사람처럼 행동했다. 왜왕이 신라를 치고자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수로 삼아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러 휴식할 때 박제상은 미사흔을 도망치게 하고 자기는 스스로 남아 잡히는 몸이 되었다. 미사흔이 돌아오자 눌지왕은 손을 잡고 서로 울면서 스스로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며 그 뜻을 나타내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향악 우식곡(憂息曲)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박제상은 결국 대마도에 귀양가서 화형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눌지왕은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그에게 대아찬(大阿찬)을 추증하고, 부인 김씨를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높이며, 그의 둘째 딸 아령(阿令)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도록 했다.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이 왜국으로 떠난 후 치술령 꼭대기에서 남편의 무사환국을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비보를 듣고 통곡하다 죽으니,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고, 넋은 새가 되어 국수봉을 돌아 근처 바위에 날아가 숨었다고 한다. 그 새가 날아가 숨은 바위를 은을암(隱乙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부인이 새가 되어 은을암으로 가면서 잠시 쉬었다가 갔다는 비조(飛鳥)마을이 있다.
뒷날에 사람들은 박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라 불렀으며 그 치술신모를 위해 치술령 기슭에 신모사라는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을 뿐 아니라 ‘치술령곡’이라는 향가를 지어 부르며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아내의 슬픈 넋을 기렸다고 ‘동국문헌비고’에 기록되었다. 오늘날에는 신모사도 치술령곡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신라시대 음악가로 섣달 그믐날 떡방아 대신에 아내에게 들려 준 ‘방아타령’을 지었던 백결선생이 박제상의 외아들 박문량이라는 것이 역사기록에는 없으나 영해 박씨의 족보에 나타나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박제상의 다른 이름인 모말과 비슷한 ‘모리질지(磨毛利叱智)’라고 기록하고 있다. 1988년 8월 8일 한일 양국의 역사학회 공동으로 대마도의 미나토 해변에 ‘신라국사(國師)박제상 순국비’를 세웠으니 한일친선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지난해 우리 나라 이혼건수가 12만6500건이나 된다고 하지만 박제상의 충절(忠節)과 지아비를 그리워하는 부인의 정절(貞節), 그리고 그 딸들의 효절(孝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한국감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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