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ASEM준비 전시행정의표본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10.16 05:13

수정 2014.11.07 12:30



서울 시내를 다니다 보면 짜증을 넘어 울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진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스팔트 덧씌우기 공사와 차선을 새로 긋는 작업 때문이다. 멀쩡한 길을 마구 헤치고 공사를 벌이고 있으니 돈이야 어찌 쓰이건 우리는 그저 세금만 또박또박 내면 되는 것인지 한심한 생각마저 든다.

서울시가 지난 9월부터 갑자기 이와같이 도로공사를 서두르고 있는 것은 오는 20일부터 시작하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앞두고 도로를 정비하기 위해서다.예산 125억원을 들이는 이 공사는 총연장 50여㎞에 달하기 때문에 교통체증과 소음및 먼지공해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번 ASEM 회의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정상급 국제회의이고 외국인 참석자만 3000명에 이르는 최고의 외교잔치임에 틀림없다.
이 행사가 성공을 거두고 각국 대표자들이 한국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가지도록 노력하는 것은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덧씌우기 공사를 보면서 관리들의 발상은 어쩌면 그렇게도 촌스럽고 권위주의적인가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외국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멀쩡한 길을 파헤치는 일은 민주주의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참석자들이 이것을 알면 오히려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예산낭비도 문제다. 정상들이 움직이는 지역에 집중적으로 공사가 벌어지고 있으니 정작 보수가 필요한 변두리 지역은 소외되고 앞으로 몇년간은 보수가 불필요한 곳을 파헤치는 모순을 빚고 있는 것이다. ASEM서울 회의가 결정된 것이 지난 96년이었는데 공사를 하려면 진작 했어야지 왜 뒤늦게 한꺼번에 법석을 떠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오는 18일부터 실시하겠다는 차량의 홀짝제 운행제도도 마찬가지다.
대표단이 움직이는 동선을 따른 차량통제만으로도 충분할 것을 변두리까지를 포함하여 서울시내 온지역에 대해 2부제를 실시하는 것은 시민의 불편과 생산활동을 제한하는 불합리한 편의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1차 회의가 열린 태국에서는 회의기간 이틀을 아예 공휴일로 지정한 반면 2차가 열린 영국에서는 회의장 앞에 걸린 참가국국기가 회의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전부였다.
전시행정의 표본을 보는 느낌은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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