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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꽁트] 나에게 소중한것


얼마전 저녁 8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나는 집안에 혼자 있었다. 한창 소설을 쓰던 중이었다. 외딴 섬에 고립된 주인공 남녀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어한을 하던 장면을 쓰고 있었다. 적합한 글귀가 잡히지 않아 관자놀이를 누르고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빙빙 돌던 생각들을 추스르려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눈을 떴다. 눈이 안떠졌다. 아니 눈이 안떠진 것이 아니라 눈은 떴는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장님이 되었나 싶게 눈앞은 어둠 일색이었다.

어둠에 눈이 익자 사물이 묽은 실루엣으로 떠올랐다. 모니터도 꺼져있었고 컴퓨터의 파워도 꺼 져있었다. 주위는 적막했고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벽을 더듬어 창가로 다가가서 커튼을 젖혔다. 길 건너편 아파트도 깜깜한 암흑 속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검은 하늘의 총총한 별들이 아파트 건물의 윤곽선을 어렴풋하게 살려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불을 꺼야 잠이 든다. 그러나 어둠의 공포에 갇혀있을 때는 다르다. 침대에 누웠어도 잠은 오지 않았다. 불길한 상상이 덮쳐왔다.

과학소설에서 읽었듯이 전염성이 강한 세균이 퍼져 우리동네만 폐쇄한 것이 아닐까. 커다란 구렁이가 전선을 타고 기어오르다가 감전되면서 고압선이 끊어진 것일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엄청난 화재가 난 것이 아닐까.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도 맡아보고,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를 잡아내려고 귀를 세우기도 했다.

정전이 된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불이 들어왔고 정전의 원인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여의도 지하소방구에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불이 났다는 것이다.

딱 두 시간 동안이었지만 나는 공포에 떨며 온갖 궂은 상상만 하고 있었다.

다음날 가족을 모아놓고 소방훈련을 했다.

만일 불이 난다면 집에 있는 집기 중에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토론을 했다. 자신이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물건을 한가지 씩 챙겨서 들고 뛰는 훈련도 했다.

아들녀석은 사사(우리집 강아지 이름)를 으뜸으로 꼽았다. 불이 나면, 사사를 물수건으로 덮어서 안고 뛰겠다는 것이다. 버금으로 중요한 물건이 컴퓨터라고 했다.

영화 ‘레옹’에서는 급히 피신을 하면서 화분을 들고 간다. 우리 집에도 아끼는 화초가 있기는 하지만, 내가 화염속을 화분을 안고 달릴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무엇을 구해야 할까. 아들녀석처럼 나에게도 컴퓨터가 밥벌이의 수단인지라 중요하긴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계가 아니고 데이터이다. 작업중이거나 탈고한 소설을 백업받아 놓은 디스켓이다. 아마도 나는 불이 난다면 디스켓을 먼저 구할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잃어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고교생인 아들녀석은 사사를 사랑한다. 그리고 컴퓨터 게임을 즐긴다. 컴퓨터는 아들에게 재산 목록 1호다. 그런데 나는 왜 다른 사람에겐 한낱 허섭스레기밖에 안되는 디스켓일까. 나에게도 값나가는 물건들이 있다. 폐물도 있고 미술품도 몇 점 있다. 돈으로 따진다면 정말 내 소설보다 두 곱 세 곱 아니 몇십 곱 비쌀지도 모를 다이아몬드 반지도 있다. 아니 고이 간직해야 할 결혼예물도 있고 추억이 담긴 선물, 외할머니가 내게 물려준 청자 기름항아리도 있다. 그러나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다면 당연히 나는 작업문서가 담긴 디스켓을 취한다.


그런데 남편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을 골프채라 한다.

참 이상한 남자다. 상상해 보라, 악마의 혀처럼 널름거리는 불꽃 사이로 골프채를 메고 뛰어나오는 남자를. 까짓 골프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도 볼품이 없을 것이다. 정이 들어서일까.

/김영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