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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으로 돌아가자(5)-국민의식이 문제다]집단이기 경제뿌리 흔들

임호섭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11.09 05:19

수정 2014.11.07 12:09


우리에게 참담한 고통을 안겨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가 언제였냐는 듯 싶게 우리 사회는 또다시 흥청거리고 있다.

거리에 넘쳐나는 고급자동차, 불황없는 러브호텔·유흥업소, 주중에도 초만원인 골프장, 공항을 가득 메운 해외여행객….

겉으로 보는 한국의 모습은 분명 글로벌 경제시대의 ‘선진복지국가’임에 틀림없다. 어느 곳에도 국제구제금융을 받은 흔적은 없다.

그러나 속사정은 딴판이다. 주식으로,땅으로 떼돈을 거머쥔 졸부들은 자신들만의 ‘패거리문화’ 속에 취해 있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허리띠를 조르고 졸라도 살기가 버겁기만하다.

계층간 갈등과 불신의 폭은 커지고 이해와 협력보다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돈이면 다된다는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면서 한국은 또다시 위기의 그늘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11·3 부실기업정리조치’로 벌써부터 100만 실업시대가 온다는 우려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경기 불황에다 건설 및 농촌의 일거리가 없어지는 계절적 요인까지 겹치면서 생활고로 집을 뛰쳐나와 거리로 나앉는 노숙자도 다시 늘어나고 있다.

이러다간 가까스로 외환위기를 넘긴 한국경제가 또다시 중환자실에 입원할지도 모르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왜 이럴까. 우리모두의 덕목인 도덕적·정신적 가치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은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잘못된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내것 내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야’ ‘좋은 자리 있을때 한탕하자’는 왜곡되고 굴절된 의식이 우리 도덕성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남에 대한 배려, 공동체 의식은 아예 찾아보기 어렵다.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장롱속 금모으기 운동까지 펼쳐가며 경제난을 극복했던 한국인의 저력은 이제 까마득한 ‘전설속의 신화’로 전락할 운명에 놓여있다.

고가 수입 브랜드가 소비불황을 비웃듯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부유층이 몰려있는 서울 압구정점 현대백화점 본점의 수입명품점인 ‘까르디에’. 이 곳은 올들어 연초 대비 153%의 매출신장세를 기록했다.

서울 소공동 L백화점 본점 ‘프라다’ 매장은 최근 한벌에 수백만원하는 옷과 100만원대 핸드백까지 혼수용품을 찾는 부우층 예비 시어머니와 며느리, 부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요즘 일부 부유층사이에서는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들의 제국’을 구축하며 계층간 벽을 쌓고 있다. 수입억원대의 재산이 없으면 회원으로 가입할 수 없는 사이트들. 한국사회의 상류층만 가입할 수 있다는 ‘www.lou000.com’ ‘www.nobl000.com’ ‘www.clubfr00000.co.kr’ 등이 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인터넷 사이트다. 이들 사이트에 가입하려면 명문대 졸업에 연봉 1억원이상은 최저선.

해외여행 바람이 되살아나면서 올들어 여행수지는 매달 평균 5444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무분별한 호화·사치품 반입 행태는 옛날그대로다. 여행객들이 몰래 들여오다 적발된 고급 양주는 지난해에 비해 56%가 늘었고 고급 골프채·캠코더·카메라·녹용 등의 고가제품의 반입도 품목에 따라 최고 38%가 늘어나 세관 유치장이 부족할 정도다.

그러나 요즘 오전 0시30분이 되면 서울역 지하도, 길 양쪽으로 자리를 펴고 잠을 자고 있는 노숙자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현재 노숙자 2700여명이 시내 106개 노숙자 쉼터에서 자활교육을 받고 있으며 거리노숙자는 약 550여명인 것으로 서울시는 추정하고 있다.

한탕주의도 만연하고 있다. 최근 문을 연 강원도 정선 탄광촌의 카지노장에는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로 연일 만원을 이루고 있다. 하룻밤에 수십만원은 고작이고 수천만원을 날리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한동안 ‘묻지마 주식투자’ 열풍에 휩싸여 유감없이 진가를 발휘했던 한탕주의가 카지노장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허가받은 도박장의 위력은 경마장도 예외가 아니다.

◇사라져야할 악습=개인의 능력보다 학연·지연·혈연을 중시하는 인맥중심의 사회풍토는 자연스런 시장경제흐름을 가로막는 가장 큰 폐단이다.

국민의 정부들어서도 ‘연’을 중시하는 과거의 악습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정부투자기관이나 산하기관의 요직은 줄을 잡아야 한다는 ‘인사 공리’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없고 의료사태 노조파업 등과 같은 집단이기주의,밥그릇싸움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2월17일 3만여명의 의사가 서울 여의도 일대에서 ‘올바른 의약분업 쟁취’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의사들은 지금까지 가운을 벗은 채 거리로 뛰쳐나왔고 약사들도 장외집회와 단식농성으로 맞서고 있다.

은행원들도 조종사들도 교사들도 밥그릇 챙기려 체면이고 뭐고 없이 운동가를 불러댔다.

이들의 집단행동은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돼 있지만 의식의 저류에는 “우리가 왜 손해를 봐야 하느냐”는 식의 이해집착이 깔려 있다.

자신들의 이해관철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참여연대 김형완 사무처장은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결과중심의 사회구조,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풍토가 사회전반의 위기를 키웠다”며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과거에 대한 성찰과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하승창 사무처장은 “공정하고 투명한 거래를 거부하는 배타적 시민의식이 음성적 뒷거래를 양산하고 시장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며 “공정한 룰을 중시하는 사회풍토가 조성돼야한다”고 말했다.

◇도덕적·정신적 가치 회복해야=한국경제를 송두리째 흔드는 이면에는 돈이면 다된다는 그릇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뿌리깊은 배금주의는 법과 질서위에 군림한다. 수천억원씩 부정을 저지르고 국가경제를 결딴내는 대형 경제비리사범이 속출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한국인 특유의 배금주의 근성때문이다.

그러나 법은 그들을 독하게 처벌하기보다는 구속 몇개월만에 사면조치하는 관용을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다. 오히려 몇십만원짜리 놀음판 가담자는 제형량을 다채우는 불평등한 모순이 번복되면서 우리 사회구성원들은 ‘돈이 최고’라는 배금주의 근성에 길들여져 있다.

고려대 사회학부 임희섭 교수는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있는 우리사회는 이미 정신적·도덕적 가치를 잃어버린 지 오래됐다”며 “돈만 벌려는 배금주의와 편법주의를 척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표지상주의가 오늘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얘기다.

일반 국민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엘리트 등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도덕적 결함은 편법을 자행하면 잘살 수 있다는 교훈을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국민의식이 쉽사리 개혁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동안 잘나가던 강남의 벤처기업가들이 재벌흉내를 내다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그릇된 배금주의의 위험성을 잘 대변해준다.

임교수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경제 등 우리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며 “국민들의 도덕적 해이는 결국 윗물이 맑아야 치료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문화적이거나 경제적이지 못한 정치적 연고주의와 지역주의가 자원과 기회의 평등을 앗아가고 있다”며 “서방국가들은 비록 민족이나 인종?^종교적 차이 때문에 갈등을 겪지만 우리처럼 반목과 불신으로 점철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경제정의실천연합 정원철 정책간사는 “가족에 대해 유별나게 집착하는 가족주의가 우리 사회의 경쟁력을 가로막고 있다”며 “일부 재벌2세들의 방탕한 생활도 가족주의에 얽매인 부의세습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임교수의 지적대로 우리사회는 특유의 정치적지역주의와 한탕주의·편법주의·배금주의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같은 폐단이 근절되지 않는 한 국민의식개혁이나 시장질서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sejkim@fnnews.com 김승중 임호섭 최진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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