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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경제교실] 결합재무제표


어느 기업이나 장부를 만든다. 많은 기업을 거느린 재벌들도 각 계열사별로 장부를 만든다. 이 장부들을 모두 모아 합산하면 재벌그룹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날까. 그렇지 않다. 재벌들은 계열사간 출자나 내부거래 관계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예컨데 현대자동차가 현대자동차써비스에 차를 팔고 현대자동차써비스는 이 차를 다시 고객에게 팔았다면 현대가 판 차는 사실 1대다. 하지만 장부상으로는 현대자동차 1대, 현대자동차써비스 1대 등 총 2대가 된다. 삼성전자가 자본금 1조원중 1000억원을 삼성전기에 출자했다면 삼성이 조달한 총자본금은 여전히 1조원일 뿐이다. 그러나 장부에는 삼성전자 1조원,삼성전기 1000억원 등 총 1조1000억원으로 불어난다. 이런 복잡한 관계를 모두 드러내는 장부가 바로 결합재무제표다.

■ 결합재무제표와 연결재무제표

결합재무제표란 계열사 전체를 하나의 기업으로 보고 중복된 부분을 상계처리한 장부다. 계열사에는 그룹 오너가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자회사까지 모두 포함된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위장 계열사를 포함해 국내외 모든 계열사의 빚이나 경영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예컨데 장부에 기록된 영업실적은 아주 좋은데 알고 보니 소리소문없이 다른 부실 계열사에 대규모 출자를 했거나 돈을 빌려줬다면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결합재무제표는 재벌들의 경영투명성을 감시하고 확인할 수 있는 핵심 수단이다.

이와 달리 30% 이상의 지분관계가 있는 계열사만 하나로 묶어 작성하는 장부를 연결재무 제표라 한다. 연결재무제표에는 그룹 오너의 지분율은 낮지만 사실상 경영권을 행사하는 계열사들이 빠져 있다. 그만큼 결합재무제표보다 그물망이 허술하다. 30대 재벌이 결합재무제표를 만들 때는 대상회사가 그룹당 평균 50여개사에 이르지만, 연결재무제표에서는 대상회사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 결합재무제표 도입 공방

우리나라에서 결합재무제표는 1999년부터 의무화됐다. 1991년말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이 장기 추진과제로 처음 거론한지 8년만이다.

그동안 정부와 재벌들간에는 논란이 많았다. 정부는 재벌들의 경영실태를 감시하고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규제하기 위해 결합재무제표가 필요했다. 그러나 재벌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모든 관계사를 포괄하는 결합재무제표를 요구하는 나라는 없다고 맞섰다. 정말 그런가. 외국의 경우 결합재무제표는 최대주주가 사실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경우에 한해 작성한다. 따라서 오너가 최대주주가 아닐 경우나, 최대주주라도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은 경우에는 대상에서 빠진다. 이 때문에 재벌들은 우리도 외국에서 하는 정도만 하자고 맞섰다. 그러지 않으면 내부 경영정보가 지나치게 많이 노출돼 경영계획 세우고 집행하는데 애로가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해외 현지법인,금융기관 등 회계기준과 결산시점 등이 다른 계열기업을 한데 묶어 장부를 만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들고 회계정보도 왜곡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재벌들은 지금도 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외국에는 우리나라 재벌처럼 총수 일가가 얼마 안되는 지분으로 경영권을 독점하고 많은 계열사를 지배하는 기업이 없다. 재벌들의 이런 경영관행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IMF 사태때 여실히 드러났다.

정부는 결국 1997년 12월 5대 그룹 총수들과 이른바 ‘재벌개혁 5원칙’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그중 하나로 결합재무제표 도입을 못박았다. 경영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1999 사업연도부터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이후 정부는 결합재무제표 작성 대상을 30대 재벌로 정하고,금융업을 포함한 국내외 계열사 중 자본금이 70억원을 넘는 회사는 모두 하나의 장부로 연결시키도록 했다.

■ 결합재무제표 뚜껑을 열어보니

2000년 7월31일. 마침내 30대 재벌의 결합재무제표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999년도 계열사별 결산결과를 하나로 묶은 종합 성적표가 나온 것이다. 그 실상은 어땠을까.

예상한대로 30대 재벌들의 ‘거품’이 한눈에 드러났다. 결합재무제표를 낸 16개 그룹(나머지 14개 그룹은 이미 부실판정을 받아 워크아웃 등에 들어간 상태) 가운데 재무내용이 더 좋아진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계열사별 경영현황을 단순합산한 일반 재무제표상으로는 11개 그룹의 부채비율이 200%를 밑돌았다. 그러나 결합 재무제표상으로는 롯데만 합격점이었다. 특히 쌍용그룹은 부채비율이 633.6%에서 1773.4%로 3배 이상 치솟았다.

그룹 매출도 계열사간 내부거래를 상계하고 나니 3분의1 가량이 꺼졌다. 현대의 경우 단순 합산한 매출액이 96조원이었으나 중복분을 상계한 다음에는 69조9337억원으로 26조원이 감소했다. 삼성은108조원에서 60조원으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 또 LG는 62조원에서 48조원으로,SK는 51조원에서 33조원으로 각각 줄어들었다. 현대·삼성·LG·SK등 4대 재벌의 총 매출중 내부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39.2%로 40%에 육박했다. 이는 5∼30대 그룹 평균인13.4%보다 3배 가까이 높은 것이다.


당기순이익도 ▲현대가 단순합계치 2조원에서 745억원으로 줄었고 ▲삼성 3조6000억원→2조9000억원 ▲LG 3조8000억원→2조7000억원 ▲SK 5500억원→2600억원으로 각각 줄어들었다.

1년 뒤인 올해 7월 2000년도 결산실적을 묶어서 집계한 그룹들의 두번째 결합재무제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표 참조>. 13개 대상 그룹 가운데 부채비율이 200% 아래인 곳은 롯데와 영풍 등 단 2곳이었다. 계열사간 기형적인 상호매출도 여전해 삼성의 경우 매출액 103조9000억원중 81조원이 상호매출로 나타났다.

김영권 정치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