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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진단] 한국 ‘동북아 비즈니스 허브’ 되려면

김영권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2.05.14 07:53

수정 2014.11.07 11:45


한국은 정말 동북아시아의 비즈니즈 허브(중심기지)가 될 수 있을까.

말은 그럴 듯하고 그림도 좋은데 그게 정말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게 이른바 ‘동북아 허브’ 구상이다. 청사진을 만든 정부 담당자들조차 “자신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허브 국가를 만들려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재원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국민 의식과 사회 관행도 모두 ‘개방 경제체제’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 한마디로 나라 전체를 뜯어고치는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수술을 받을 의지와 기초체력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계획도 한낱 장밋빛 환상일 뿐이다.
‘동북아 허브’ 프로젝트가 빠지기 쉬운 함정도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동북아 허브는 우리가 원하면 하고, 싫으면 안해도 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의 미래가 걸려있는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의 개혁이 관건하다=동북아 허브국가의 성패는 물류·비즈니스 시설 같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하드웨어에 내용을 채우고 그것을 가동시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에 달려 있다.

동북아 허브를 만들려면 외국인 직접투자를 제조업 위주에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식기반산업 위주로 바꿔야 한다. 이와 함께 외국 고급인력을 국내로 대거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나 해외 고급인력은 언어·교육·의료·복지·주거·교통 등 제반 생활여건이 부실한 곳에는 결코 정착하지 않을 것이다.

안충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동북아 허브는 정치·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것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는 총체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뜻한다”며 “국민들이 이같은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면 ‘허브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박정동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동북아 허브는 정부 의지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의지에 달려 있다”며 “공항·항망·도로·통신 등 하드웨어는 빚을 내서라도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을 운영하는 소프트웨어와 사람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외국인과 외국자본에 대한 ‘오프 마인드’가 최소한 대만이나 동남아 수준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북아 허브 프로젝트를 총괄한 박병원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장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동북아 허브는 전방위 개방을 전제로 한다”며 “지금은 제조업 중심으로 개방을 했지만 앞으로는 교육·의료·법률 등 서비스 쪽의 대대적 개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이 한국을 사업하기 좋고 살만한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 한 동북아 허브는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영어 인프라와 교육개혁이 최우선 과제다=영어는 동북아 허브의 최우선 필요조건이다.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학교가 없어도 ‘꽝’이다. 획일적인 평준화와 입시지옥으로 인해 ‘교육이민’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에 해외 전문인력이 자녀와 함께 오지는 않을 것이다.

LG상사의 중국지역 본부장과 사장을 지냈던 천진환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동북아 허브의 하드웨어를 작동시키려면 자유롭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15만∼20만명의 젊은 인력이 필요할 것”이라며 “국제화 인력을 집중적으로 키워내는 전문 프로그램을 하루 빨리 마련해 시행해야만 동북아 허브 구상은 탁상공론을 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기환 골드만삭스 국제담당고문은 지난 7∼8일 파이낸셜뉴스가 개최한 서울국제금융포럼에서 “고등교육시스템의 개혁이 동북아 허브의 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마크 모비우스 템플턴 자산운용 전무도 “한국은 지속적으로 영어 구사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캠페인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개방·경쟁 기피증 너무 강하다=교육개혁은 제자리에서 말만 요란한 상태다. 획일적인 평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립형 사립고를 늘리기로 했지만 올해 신청 학교는 단 1개에 그쳤다. 불과 2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립형 사립고를 희망하는 학교는 10여개를 넘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부분 포기로 나타났다. 재단전입금 비율 등 조건이 너무 까다로운데다 차별화 교육에 반대하는 일부 교육단체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영종도 등 경제특구에 세워질 ‘국제대학’과 ‘국제고등학교’도 결국 용두사미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국제자유도시로 지정된 제주도에도 외국인학교가 없고, 설립 움직임 또한 없는 상태다. 정부는 제주도에 한해 내국인의 외국인학교 입학조건을 ‘외국 거주 5년 이상’에서 ‘3년 이상’으로 낮췄다. 그렇지만 아직도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초일류 외국계 병원을 유치하는 문제도 장담할 수 없다. 보건복지부는 경제특구에 들어서는 외국계 병원은 외국 환자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까지 했다.


이럴 경우 외국인은 국내에서 첨단 의료 서비스를 받는데 내국인은 미국에 가서 선진 치료를 받아야 하는 ‘코미디’가 벌어질 수도 있다. 국내 의료계는 앞으로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외국인 전용병원’을 고집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 법률·학원·회계 등 다른 전문 서비스 영역에서도 개방 갈등이 격화돼 동북아 허브 프로젝트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ky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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