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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삼영 뉴욕포커스] 반미감정과 재미동포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는 “우리 인류가 역사에서 배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또 어제의 원수가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면 오늘의 동지로 손을 잡는 야누스적인 역사의 되풀이를 비판한 듯싶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기만 문제일 뿐 기정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는 현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미국의 혈맹임을 자부하던 프랑스와 독일이 미국의 정책에 날카로운 각을 세우고 있다. 지난 97년의 IMF 외환위기 이후 한·미 양국의 관계도 너무도 많이, 그리고 빠르게 변했다. 5년 전과 비교할 때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강국이지만 경제는 곤두박질하고 국민들은 테러 공포에 지쳐 있다. 정권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뀌면서 보다 경직된 상태다.

5년 전 단돈 10억달러도 없어 쩔쩔 매던 한국은 이제는 1200억달러대의 외환보유고를 자랑한다. 많은 국민들이 북한과의 전쟁 공포보다는 오히려 미군철수를 공공연히 주장하며 반미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일부 한국민들 사이에서 ‘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 북한과 민족 공조를 이루자’는 구호가 나오는 것처럼 미국에서도 ‘동맹국 한국과 손을 끊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불과 몇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이같은 극단적 변화 앞에 가장 혼란스러운 이들은 아마도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에 체류중인 한인동포들일 듯싶다. 이민, 유학, 직장 파견근무 등으로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한국인이 150만명에 이른다. 한국에서 한집 건너 한두 명씩 미국과 관련이 없는 집이 드물다는 얘기다. 2003년은 한국인의 미국이민 100주년인 동시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올해는 미국의 한인들에게 어찌 보면 이민 100년사(史)에서 가장 난감한 해가 되고 있는 듯하다. 북한의 핵 문제가 미국의 머리끝 쟁점으로 올라와 있는 마당에 한국에서는 미국이라는 강국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미국에 대한 새로운 관계 설정요구는 미국 행정부를 민감하게 자극하고 있다.

미국 TV는 한국의 반미시위에서 성조기가 불타는 장면을 자주 방영한다. 미국 주류 사회가 한인을 향하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음은 당연하다. 이를 접하는 한인들에게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 위기마저도 느껴진다. 지난주 시민권 인터뷰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만일 북한과 미국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이 전쟁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시험관의 질문에 매우 당황했다는 어느 동포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어쩌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에 필자 역시 한동안 심한 무력감에 시달렸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민 100년사를 자화자찬하면서 떠들썩함에 빠져 현실 인식이 안이했던 대다수 한인 동포들의 입장과 처지가 매우 어정쩡한 형편이다. 지난 100여년간 이러한 상황이 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을 못했으며 따라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향상될수록 미국과의 관계에서 ‘상호존중과 대등한 동반자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견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한·미 동맹의 굳건한 틀 안에서 추진돼야 한다. 지금은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되돌아보고 서로가 파트너로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차분히 생각해볼 시점이다. 한국정부는 미국문제와 관련해 객관적 여론이 형성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며 국민들은 한·미동맹 관계가 주는 혜택을 보다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언론 역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전달과 감정적인 보도를 자제하고 한국의 국익을 유념해야 한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 아래 굶주리고 있는 주민들이 우리의 민족이듯이 미국 사회에 진출해 고국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살고 있는 150만명의 한인들도 우리의 핏줄이다.

국내외적인 반미감정과 이에 따라 미국에서 일고 있는 반한감정은 미국에 체류중인 모든 한인들에게는 그들의 하루하루 생활과 꿈과 미래에 직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삼영 미국 롱아일랜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