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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고개 숙인 회장님들


재계가 새로 출범한 참여정부의 정책기조를 따라가느라 숨가쁘다. 개혁적인 정책주문에 당혹해 하면서도 일단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다.

최근 재벌수사 과정에서 ‘고개 숙인 회장님’의 모습을 지켜본 직원들의 반응 중에는 자기네 그룹 회장이 수사대상에 포함됐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한가지 공통분모가 있었다.

담임교사에게 숙제검사를 받는 초등학생들처럼 위축되고 조심스러워 하는 총수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그 모습은 역대정권에서 너무나 자주 본 것인데, 왜 참여정부에서도 똑같으냐는 것이다.

한 젊은 회사원은 “개혁의 실천을 다짐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회장님들이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뭔가 답답하고 짜증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지적은 ‘재벌개혁 이후의 경제모습’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이 시점에서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이 꼭 한번 새겨봐야 할 질문을 던진다. 구조조정을 이끌어가는 정부의 자세가 과연 ‘시장경제’의 철학에 부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개혁의 시급성을 내세워 관치경제 시절의 권위주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다.

재벌개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나라 경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재벌해체 쪽보다는 재벌의 진화론에 근거한 재벌개혁을 찬성하고 있다. 그동안 재벌기업이 담당해왔던 경제성장과 고용, 수출의 기능은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재벌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새 정부의 재벌개혁은 확실한 명분이 있고,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게 사실이다. 낡고 부적합한 경제시스템을 개혁하지 못해 나라가 부도나는 IMF 외환위기를 겪은 우리이기에, 구시대의 잔해를 털어내는 과정에서 다소간의 ‘무리’가 불가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개혁작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해서, 정부가 브레이크 없는 불도저가 되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정부라면 이에 발맞춰 스스로의 자세를 전환해 나가는 성찰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시장경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정부가 할 일은 바로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와 여건을 만들어 주고, 심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공정한 진행자’를 표방하면서도 아직 ‘전권을 가진 황제’의 몸짓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다. 지난 정권에서 기업들에게 요식행사를 강요하는 등의 사례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적지 않았음을 돌아보기 바란다.

정부가 재벌개혁 후의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는 벤처기업과 중소기업의 육성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벤처기업의 메카인 미국에서조차 벤처기업의 성공 확률은 5%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는 더욱 성공 확률이 낮다.

특히 많은 중소기업이 재벌기업의 하청회사로 계열화돼 있기 때문에 재벌이 해체되거나 문을 닫을 경우 ‘동반도산’하는 사태가 일어날 게 뻔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는 부자도 있고 중산층도 있고 서민도 있는 법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영세기업이 공존공생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물론 중산층의 두께가 두터워야 사회가 안정되고 체제가 튼튼해지기 마련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잘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유도하는 것이 시장경제의 본질이다.

미국, 영국, 뉴질랜드 등도 경제개혁과 기업의 구조개혁에는 7∼10년이 걸렸다. 개혁은 정권을 바꿔가며 꾸준히 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재벌개혁에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장원리와 규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울러 ‘재벌 회장님’도 정부의 질책이나 검찰수사보다 ‘국민의 심판, 시장의 심판’이 두려운 시대임을 인식하고 스스로 개혁을 서둘러 정정당당해져야 할 것이다. 다시는 검찰청사 포토라인에 서서 머리를 조아리는 ‘회장님들’의 모습을 볼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윤봉섭 정보과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