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경제 유통

[CEO 창업열전] 권원강 ‘교촌치킨’ 사장

정보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3.09 09:13

수정 2014.11.07 18:39


돈통을 다시금 헤아려본다. 달랑 천원짜리 석장이 권사장을 비웃듯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자신을 원망스레 바라보는 아내. 아내의 볼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감지하지만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아내의 얼굴을 보면 자신도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두 마리, 세 마리를 팔더군요. 그러나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지요. 어떻게 해서 차린 가게인데….”

1991년 3월13일 권원강 사장(당시 41세)은 경북 구미시 외곽에 치킨집을 차렸다. 대구시에서 노점생활 5년여, 그리고 택시기사로 또 5년 등 10여년간의 고생 끝에 마련한 치킨집이었다.


개업식 날, 주변의 도움으로 수지를 맞춘 이래 서너달째 내리 죽을 쑤고 있었다.

“가게를 차리기 전에 택시기사를 했는데 너무 힘들더군요. 당시 몸이 정상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개인택시, 셋방까지 털어 만든 금액이 3000만원. 이 돈을 가지고 대구시에서 가게를 얻지 못하고, 구미시 원평동에서 가게를 얻었지요. 보증금 1500만원에 월새 45만원이더군요.”

지금은 시내 중심권에 속해지만 당시로서는 외곽 지역이었다. 상호명은 ‘교촌통닭’. 권사장은 가게 한쪽에 두평짜리 방을 만들고 생활했다.

배수진(背水陣). 이제 여기서 물러난다면 죽음밖에 없다. 절박한 심정으로 연 가게였다. 그러나 가게 월세조차도 맞추지 못하는 나날들의 연속으로 권사장 부부는 거의 사색이 되었다.

닭요리에 대한 어떤 노하우도 없이 차린 치킨집이란 게 문제의 시발이었다. 단지 어릴적 재래시장에서 먹던 맛을 재현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차린 가게였던 것이다.

권사장은 이날 이후 매일 밤 기도하는 자세로 닭요리를 연구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것은 맛이 없기 때문’이라는 판단에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과 차별화된 맛있는 닭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 이게 그에게 떨어진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아니 그의 목숨을 건 화두였다.

참으로 다행스런 것은 여름철에 접어들면서 매출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닭요리 개발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흥도 났다. 자신이 연구한 닭요리에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다는데 희열마저 느꼈다. 포인트는 간장이었다. 간장을 중심으로 한 소스개발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우리 입맛에 가장 알맞은 정통 소스라는 판단에 간장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지요.”

권사장은 맛개발에만 힘쓴 것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고객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 또한 끊임없이 이뤄졌다.

“한여름 치킨을 배달하는 차량의 문을 연 적이 없어요. 식으면 맛이 떨어지잖아요. 물론 배달용 차에는 에어컨도 없었고요. 땀에 젖은 몸으로 배달하면 고객들이 놀라곤 했지요.”

그의 정성에 반해서일까. 오픈 7∼8개월이 지날 무렵부터는 제법 매상이 올랐다. 현상유지 수준인 하루 20마리 매상을 거뜬하게 올리게 된 것이다.

“힘이 솟더라고요. 이제는 밥을 굶을 걱정은 없다는 생각에 신이 났지요.”

그해가 가기 전에 월간기준으로 처음으로 50만원의 흑자가 나왔다. 그는 그 돈을 전량 지역정보지 광고비로 투자했다.

“아내의 반대가 심했지요. 이제 겨우 흑자를 기록했는데 그 돈을 전부 투자하면 어떻게 되겠냐고 극구 말리더군요.”

효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매상이 늘어났다. 가게를 오픈한지 3년이 지나자 하루 100마리 이상 닭을 팔게 됐다. 주말 판매량은 이보다 훨씬 높은 150마리에서 200마리를 헤아릴 정도가 됐다. 그의 손도 덩달아 바삐 움직이고, 손맛도 더욱도 정교해졌다.

교촌치킨 가맹점 1호는 우연찮게 이루어졌다.

장사를 시작한 지 3년 6개월이 지난 1994년 9월께 권사장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

“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가맹점을 내달라고 하대요. 그 사람은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이 설명하면서 경북 김천에 가게를 내게 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지요.”

이후 구미를 중심으로 하나둘씩 가맹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0개 정도로 가맹점이 늘어나자 권사장은 새로운 결심을 한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보자. 배운 것도 없고 경력도 일천하지만 남자로서 승부수를 던지자.’

구미 가게를 종업원에게 물려주고 권사장은 대구시 태전동에 30평 규모의 사무실을 냈다. 직원 4명으로 시작한 사업은 그러나 만만치 않았다. 대구 특유의 보수성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렵게 하나둘 연 대구시내 가맹점은 제대로 맥을 추지 못했다.

돌파구는 골드윙에서 나왔다. 닭날개요리로 개발한 골드윙이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이다. 대구시 접수도 골드윙이 날개 돋은 듯 팔리면서 이루어졌다.

“닭날개는 별로 인기가 없었잖아요. 이를 어떻게 하면 맛있는 부위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까 연구 끝에 개발한 것이 골드윙입니다. 골드윙은 개발되자마자 교촌가맹점에서 인기 1위 품목으로 급부상하더라고요.”

프랜차이즈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대구시를 시작으로 울산시, 부산시, 창원시 등 영남권을 휩쓴 교촌은 1998년부터 충청권과 강원 등지로 범위를 넓혔다. 지역에서 튼튼한 기반을 닦은 교촌이 수도권 공략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 맛의 고향이라던 호남공략도 같이 시작됐다.

뒤늦게 수도권 공략에 나섰지만 서울 입성은 화려한 기록을 양산하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수도권 지역에서만 3개월여만에 가맹점을 100개 이상 만든 것. 지방업체의 서울 공략이 대성공을 한 것이다. 2003년 3월 현재 전국 가맹점 수는 590여개. 이 추세대로라면 연내에 1000호점 돌파도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이처럼 교촌의 확산에는 무엇보다 맛의 차별화가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닭다리만으로 이뤄진 로얄, 닭날개만으로 골드, 닭다리와 닭날개를 혼합한 스페셜 등은 특히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에 개발, 대형 매장에서만 팔고 있는 하드윙은 술안주로 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닭고기를 먹을 때 양념이 찐득진득하게 손에 묻지 않는 점도 교촌치킨만의 장점이다. 포장용기의 고급화도 다른 치킨집과 비교, 차별화되는 요소다.

“저는 가맹점주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사업이다.
더 이상 다른 아이템은 없다’ 라고 생각하자고 얘기합니다.”

소자본 창업에 왕도는 배수진이라는 말이다.


“배수진을 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에서 처량한 모습으로 서 있었을 것입니다.”(054)971-9995

/ hinoon@fnnews.com 정보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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