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 SK-채권단의 말장난

임대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5.09 09:30

수정 2014.11.07 17:44


‘계약서상의 ‘갑’과 ‘을’의 관계입니다’ ‘의사와 보호자의 관계입니다’ ‘의사와 간호사 관계라고 하죠.’

도통 알 수 없는 말들이지만 SK글로벌 사태를 놓고 SK그룹과 채권금융기관의 관계를 정의하는 말들이다. SK그룹 구조조정본부의 이노종 전무는 지난달 25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채권단이 SK글로벌 사태에 대한 책임을 일방적으로 SK그룹에만 떠 넘기려 한다”며 “SK글로벌 문제는 SK와 채권단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해 ‘채권단 공동책임론’을 제기했다. 이전무의 이같은 발언이 보도되자 채권단은 “누가 누구한테 책임을 떠 넘기느냐”며 발끈했고 이후 채권단이 그룹계열사들의 출자전환을 강력히 요구하는 등 양측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됐다.

이전무는 당시의 발언에 상당히 신경이 쓰였는 지 9일 기자간담회에서는 “SK와 채권단은 계약서상의 ‘갑’과 ‘을’의 관계”라며 “채권단이 기라면 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룹은 힘이 없다”고 말했다. 흔히 계약서상의 ‘갑’은 ‘을’에 비해 계약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나 업체라는 것을 빗댄 비유였다.

‘을’이 말하는 것이 마치 ‘갑’과 같다는 기자들의 농담(?)이 이어지자 이전무는 “그룹과 채권단은 한 명의 환자(SK글로벌)를 공동으로 치료하는 의사들”이라고 표현했다.
채권단에서는 ‘채권단-SK글로벌-SK그룹’을 ‘의사-환자-보호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자 “그럼 의사(채권단)와 간호사(SK그룹)라고 하자”고 되받아쳤다.

이처럼 채권단과 SK그룹이 서로의 관계설정에 민감한 이유는 환자(SK글로벌)를 치료하는데 드는 치료비(지원)를 누가 더 많이 내야 하느냐는 예민한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SK그룹이 ‘보호자’가 되면 당연히 대부분의 치료비 부담을 떠 안아야 되고 채권단과 동등한 ‘의사’가 된다면 비용을 공평하게 분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해당사자들의 이같은 논쟁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이 말 그대로 ‘말장난’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논쟁에 정작 직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는 ‘국민’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일과 6일 하나은행 본점에는 SK글로벌 채권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보게 된 신탁상품 투자자 100여명이 몰려와 손실을 보상하라며 격렬히 항의했다.
그러나 SK그룹이나 SK글로벌, 채권단 어느 누구도 이들의 ‘절규’를 가슴을 열고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 dhlim@fnnews.com 임대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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