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시론] 디플레 유려되는 한국경제 / 고승의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5.21 09:33

수정 2014.11.07 17:36


기업의 현금보유액이 지난해 말보다 크게 늘고 있다. 1조원 이상의 현금을 가진 기업도 5곳이나 된다고 한다. 한국상장회사 협의회는 최근 12월 결산 488개 상장회사의 3월말 현재 현금 보유액은 20조5276억원으로 지난해 12월말보다 28.3% 늘었으며, 상장회사 전체의 보유현금이 20조5000억원에 이르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는 우리 경제도 디플레이션의 위험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명백한 시그널이다.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 상황에서는 거꾸로 현금의 가치가 증가하므로 기업은 불확실한 투자보다는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이익이다. 우리 기업들은 정확히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디플레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19세기 후반처럼 급속한 생산성 향상의 결과로 디플레가 발생한다면, 물가하락과 탄탄한 경제성장이 손을 맞잡고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이 아닌 소비와 수요의 위축으로 인해 물가가 하락한다면, 디플레는 경제전반에 매우 위험한 역기능을 초래한다. 최근의 디플레 징후는 안타깝게도 1990년대 후반의 세계적인 공급과잉으로 인한, 전자가 아닌 후자의 이유가 보다 지배적이라고 추정된다.

디플레는 세계적인 현상

특히 가계나 기업이 부채를 많이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더욱 위험하다. 왜냐 하면 떨어지는 물가는 실질적인 부채 부담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담은 악순환을 유발한다. 부채부담이 가중된 기업은 지출을 줄이고, 신규투자를 회피하며, 인원을 감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다시 디플레를 더욱 가속시킨다.

이제까지 디플레에 대한 경고를 가볍게 여기거나 부인해 오던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마침내 디플레 가능성을 경고했다. FRB는 “향후 몇 분기를 내다볼 때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이 더 우려된다”고 언급했다. FRB가 분명하게 디플레 가능성을 경고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2001년 4·4분기의 2.8%에서 지난 3월에는 1.7%로 떨어졌는데, 이는 1966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이다. 유로 국가의 인플레이션율은 지난 12개월 동안에 2.6%에서 1.7%로 떨어졌다.

우리나라 경제는 디플레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디플레의 위험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미 세계경제에 편입된 우리경제는 전세계적인 현상인 디플레에서 초연할 수는 없다. 일본은 이미 디플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독일과 미국도 디플레에 매우 취약한 실정이며 개발도상국들도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낮은 인플레율을 보이고 있다.

기업의 경영활동을 도와야

디플레의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문제는 부동산투기와 기업의 성장엔진 실종이다. 최근 다시 꿈틀거리고 있는 특정 지역의 부동산가격 상승은 장기적으로 보아 거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디플레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마땅히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한 부동자금이 아파트 재건축시장을 부추기고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일반투자자들은 투기세력에 휩쓸려 어리석은 의사결정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품이 꺼지면서 초래되는 후유증은 경제전반에 걸쳐 매우 광범위하고 고통스러운 충격을 주기 때문에 정책당국은 부동산 문제를 경기조절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지 말고, 사회복지 차원에서 보다 장기적인 정책을 수립하여 일관되게 집행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자신의 역할을 기업의 활동을 도와주고 시장의 실패를 예방하는 정책개발로 역할을 제한해야 하며, 북한핵·노사·기업투명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여 기업의 경영활동을 위한 예측가능성을 높여 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공기업과 정부산하의 금융기관 등 공공부문에 만연해 있는 도덕적 해이를 우선적으로 개선하지 않는 한 우리 경제의 경쟁력 향상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고승의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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