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창업

[CEO 창업열전] 코리안 숯불 닭 바베큐 이원성 사장

정보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5.25 09:34

수정 2014.11.07 17:34


등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이대로 모른 채 할까 망설이는데 곧이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울긴 왜 울어.”

냅다 소리쳤다. 화가 나서 소리치는 것은 아니다. 미워서도 아니다.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토바이를 세웠다. 하늘에는 달이 떠있다. 초생달이다. 아내를 뒤돌아 본다. 희미한 달빛에 흐르는 눈물이 어렴풋이 보인다. 아내를 꼬옥 안지 않을 수가 없다.

“몇 달 동안만 고생하자. 새차를 사줄게.”

그는 물론 아내가 원하는 것은 새 차가 아님을 잘 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 뿐이었다.

봄이지만 아직 새벽바람은 차다. 차거운 바람이 가슴을 가로지른다. 바람은 가슴을 거쳐 머리까지 휘돌아간다.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친다. 서늘하다는 생각보다는 오싹하다는 얘기가 맞을 것이다.

1998년 3월 이원성 씨(당시 41세)는 수원 성균관대 앞에 25평 규모의 치킨집을 열었다. 자가용까지 처분해 마련한 가게였다. 상호명은 ‘코리안 숯불 닭 바베큐.’

차가 없다보니 장사를 마친 후 귀가 길의 동반자는 오토바이. 당시 이씨는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아내와 함께 아파트 집집마다 일일이 전단지를 돌렸다.

“전단지 돌리는 시간은 새벽 2시쯤일 겁니다. 가게문을 닫는 시간이 그 무렵이었으니까요. 한시간 정도 아내와 함께 주변 아파트를 돌면 다리가 통통 부었지요.”

새벽에만 이사장이 부지런함을 떤 것은 아니었다. 가게 문을 열고 오후가 되면 수레에 닭 요리를 가득 싣고 대학교정에 나갔다. 학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밤낮이 없는 이러한 홍보 덕에 가게는 오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명물이 됐다. 맛 또한 탁월해 개업 한 달이 지나자 손님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이사장은 특히 맛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가게를 오픈하기 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개발한 닭 요리는 이 사장의 자부심과 다름 아니었다.

“1998년 여름부터 6개월 이상 닭고기 맛 개발에 몰두했지요. 밤낮 닭고기 소스를 개발한다고 끙끙대니 집사람이 처음에는 화를 내더니만 나중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더군요.”

이 사장이 목표로 한 것은 동서양의 맛이 조화된 소스개발. 소스개발은 가게 오픈 전인 1999년 봄에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20여 한방 재료에다 고추장이 적절히 배합된 소스였다. 독특한 향이 나는 소스였다.

“담백한 소금구이, 매콤한 한식 맛, 새콤달콤한 양식 맛 등 3가지 맛을 개발했지요. 반응이 너무좋게 나타났어요. 학교 공원 양로원 등을 찾아가 시식회를 열었는데 이구동성으로 최고의 맛이라고 하더군요.”

이 사장의 이력은 특이하다. 그의 최초의 직업은 육상장거리 선수.육상선수시절 경호 경부 역전 마라톤에 참가, 구간신기록을 갖고 있던 유망주였다. 이후 육상코치를 거쳐 증권회사에 잠시 몸담았다가 친지를 따라 다니면서 건축일을 배웠다.

건축 일이 한창 물이 오를 무렵인 지난 1997년에 이사장은 IMF 직격탄을 맞았다.

“그 해 유달리 외상공사가 많았어요.”

그때 물린 억대의 돈 때문에 이사장은 이후 격심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낮에는 빚 독촉하러 돌아다니고 밤에는 술로 보내는 세월. 한 반년동안을 그런 식으로 헤매다 보니 가정경제는 한마디로 파산직전이었다.

그가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 장사. 막다른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그러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치밀한 준비를 거친 선택은 이사장을 장사꾼이 아닌 사업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것이다.

장사를 시작한 지 서너 달이 지나자 주변에서 가게를 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들의 요구를 웃음으로 무마했지만 날이 갈수록 요구가 거세졌다.

요구가 강해지면서 마냥 거절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에 대한 열망도 꿈틀거렸다.

‘건축일의 실패는 불가항력이었어. 다시 한번 해봐. 너는 성공할 수 있어’ 하는 소리가 이 사장의 마음 한 켠에서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기로 했다. 장사 시작 5개월 만인 1999년 8월 수원역 인근에 가맹 1호 점을 개설했다.가맹점은 소리소문없이 늘어났다.

2001년 봄이 되자 가맹점은 30개를 넘어섰다.

이 사장은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사업에 뛰어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업에 뛰어든 이상 중도 포기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마라톤으로 시작한 인생이지 않는가.’ 꼭 완주를 해야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그것도 화려한 완주를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 해 4월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프랜차이즈 사무실을 마련했다. 직원도 4명 채용했다.

다음 달인 5월에는 경기 용인에 1020평 대지에 건평100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했다. ‘코리안숯불 닭 바베큐’호가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반응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이후 한 달에 10여 개씩 가맹점이 늘어났다. 100호 점 돌파는 이듬해인 2002년 1월에 이루어졌다. 수원 북문점이 100호 점이다. 200호점 돌파도 지난해 말에 이루어졌다. 이제는 300호점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가맹점 확산에는 가맹점주의 입 소문이 단단한 역할을 했다. 가맹 업체들의 평균 매출은 60만∼70만원선. 하루 200만원을 넘어서는 곳도 있다. 체인점 마진이 60%정도이니 수익성은 보장되는 셈이다. 수익이 보장되니 가맹점주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권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체인화를 처음 시도할 때 수원소재 모 주류 업체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고객에게 의례 제공되는 냉장고 지원 건을 말했지요. 그런데 주류업체 사장이 대뜸 프랜차이즈 사람들은 다 사기꾼이다며 거절하더군요.”

그것은 한마디로 수모였다. 정직으로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사기꾼이다는 별칭이 붙은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밤낮으로 회사를 키우는데 모든 역량을 기울였다.

1년 후 그 주류업체 사장이 이 사장을 찾아왔다.
이제는 그 주류업체의 최대 고객이 된 이사장이었다.

“주류업체 사장이 사과를 하더군요. 그 사과 한마디에 눈물이 흐르더군요. 그 사과 한마디를 듣고 싶어 지난 1년동안 그토록 발버둥쳤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사장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사 말한다.


“사기꾼과 눈물은 자신이 사업을 확장시킨 모멘트가 되었지요. 특히 달빛에 흐르는 아내의 눈물,사과 한마디에 흘린 복박친 눈물은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031)206-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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