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에이터]영화같은 삶을 살았노라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02.02 12:31

수정 2014.11.07 21:59



아카데미는 한 인간의 굴곡진 삶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낸 휴먼드라마를 짝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유태인을 도운 독일인 기업가 오스카 쉰들러의 이야기를 담은 ‘쉰들러 리스트’(94년)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수학자 존 내쉬의 삶을 그린 ‘뷰티풀 마인드’(2002년)의 작품상 수상도 아카데미의 편애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올해는 미국 항공산업의 개척자이자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로 여배우들과 숱한 염문을 뿌렸던 하워드 휴즈(1905∼1976)가 주인공이다. 지난달 25일 아카데미영화상을 관리·운영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갱스 오브 뉴욕’의 마틴 스코시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콤비가 만들어낸 전기영화 ‘에비에이터’(원제 The Aviator)에 11개의 예비 월계관을 수여, 최다관왕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에비에이터’는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마틴 스코시즈), 남우주연상(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남·녀조연상(앨런 알다·케이트 블란쳇) 등 주요부문상 외에도 미술상, 편집상, 촬영상, 의상상, 음향상, 시나리오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면서 올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스스로 경비행기를 조정하는 비행사(에비에이터)이기도 했던 하워드 휴즈는 할리우드가, 혹은 아카데미가 사랑할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인물이다.
출중한 외모에 총명한 두뇌를 가진 그는 이미 20세의 나이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투입해 만든 영화들은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대박 신화를 일궈냈고, 결국 ‘영화는 꿈을 실현하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일깨웠다는 점도 할리우드 제작자들에게는 매혹적이다.

또 진 할로, 캐서린 햅번, 에바 가드너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을 발굴하고 그들과 로맨스를 뿌린 남자라는 사실도 영화제작자들에게는 유혹적이다. 미국 굴지의 TWA 항공사를 경영한 오너이면서도 스스로 조정간을 잡아 두번이나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는 점, 개인전용비누를 가지고 다니며 30분 간격으로 손을 씻는 결벽증 환자였다는 점, 말년엔 진공유리관 속에서 생활하며 세균공포증에 시달렸다는 점 등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무릎을 칠만한 일이다.

그러나 ‘영화적인 너무나 영화적인’ 하워드 휴즈의 일생이 장점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과 좌절, 유혹과 시련, 찬사와 비난 등 삶의 무늬를 수놓고 있는 여러 순간들을 2시간40분의 러닝타임 속에 우겨넣으면서 영화는 전기영화의 밋밋한 이야기 구조를 피해가지 못했다.
결벽증과 세균공포증에 시달리면서도 신형 비행기를 손수 조정했다거나, 항공산업에 대한 열정으로 불태우는 한켠에서 숱한 여성을 침대로 불러들인 ‘미치광이 억만장자’의 모순이 오롯이 드러나지도 않았다.

캐서린 햅번 역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이나 에바 가드너 역을 맡은 케이트 베킨세일의 연기도 매력적이지 않다.
또 한국관객들, 특히 영화의 주관객층인 젊은 세대에겐 낯설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도 결정적인 단점으로 작용할 듯하다. 15세 이상 관람가. 18일 개봉.

/ jsm64@fnnews.com 정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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