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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천의 얼굴’ 런던/안병억 런던특파원

김성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02.10 12:32

수정 2014.11.07 21:47



700여만명이 모여사는 대도시 영국의 런던. 각양각색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다문화 실험장이다.

최근 일간지 가디언은 런던의 다채로운 모습을 소개하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런던을 한번 보자. 런던에서 쓰이는 언어는 약 300개가 넘는다. 또 1만명 이상, 자체적으로 타운을 형성한 인종의 수가 50개를 웃돈다. 영국은 미국처럼 이민으로 이뤄진 나라도 아니고 이민을 환영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지난 2001년 런던시가 실시한 인구 센서스를 보면 런던 거주민의 30%가 외국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말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제국을 형성했던 영국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시내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각국 요리만해도 70개가 넘는다. 인도 카레는 영국 요리가 된 지 오래다. 양고기 기름을 빼고 고기를 다진 후 둥그렇게 말아 속에 채소를 집어 넣은 터키 요리 케밥은 런던 시민이나 런던을 찾는 외국인들이 즐겨 먹는다. 금융 중심지 ‘더 시티’ 인근에도 대형 한국식당이 있다. 평일 점심 때 이 곳을 찾으면 근처에서 근무하는 영국인이나 독일인을 흔히 볼 수 있다.

일전에 이 곳에서 식사를 하다가 김치를 먹고 있는 외국인에게 호기심에 질문을 던졌다. 인근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영국인이었는데 김치를 좋아한다며 1주일에 한 두번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고 한다.

특집 기사는 뉴몰든 한인촌을 다루고 있다. 뉴몰든은 도심 워털루역에서 기차로 20여분 걸리는 남쪽 교외에 있다. 간판의 3분의 1이 우리말로 돼 있을 정도로 한인들이 많다. 현재 영국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는 3만5000여명 정도. 영어를 배우러 온 사람이 1만5000여명, 유학생과 주재원 가족이 1만4000여명, 교민이 약 6000여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60%가 넘는 2만여명이 뉴몰든과 인근 킹스턴에 몰려 있다. 유럽에서 이처럼 큰 한인촌이 형성돼 있는 곳은 런던이 유일하다.

왜 이 곳에 몰려살게 되었는가에 대해 뚜렷한 답은 없다. 가디언은 인근 한인의 말을 인용, 식당과 슈퍼마켓이 점차 교민을 불러들였다고 분석했다. 지난 80년대 중반까지 상사 주재원과 외교관들은 특별한 밀집구역 없이 런던 시내 이곳저곳에 살았다. 그러나 교외에 있어 방세 등 물가가 비교적 싼 뉴몰든에 한국 식당과 슈퍼마켓이 하나 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주재원과 영어를 배우러 온 학생이나 유학생들도 이 곳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인촌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교민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인=개고기를 먹는 야만인’으로 잘못 알려진 점이다. 지난해 일간지 더 타임스는 한국인이 뉴몰든에 사는 이유가 개고기를 먹기 위한 것이라는 근거 없는 추측성 보도를 냈다.

외국인이 바라보는 토박이 런던인의 모습은 어떨까. 이방인들은 제일 먼저 ‘차갑다’고 말한다. 터키 여성 빌센(40)은 3년 전부터 런던에 살고 있다.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 영국인 승객 가운데 누구 하나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왜 이리 무심할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해할 만하다. 영국인들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말을 걸기 전에는 먼저 말을 건네는 일이 드물다.

또 하나, 런던 거주 이방인들은 영국인들과 같은 지역에 함께 살기보다 자체적으로 타운을 형성해서 살고 있다. 이 때문에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 서로 모르거나 오해하기 일쑤다.

정치인들은 이 점을 악용하고 있다. 오는 5월 총선이 예정된 가운데 제1 야당 보수당은 “영국에 너무 많은 난민이나 이민자가 몰려 온다”며 “이민할당제(쿼터)를 도입할 것”이라는 공약을 제시했다. 유엔 난민협약이 쿼터제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이런 공약을 제시한 점은 일부 시민의 불만을 적절히 활용하자는 속셈이다.


필자도 뉴몰든에 있는 한인슈퍼마켓을 찾았을 때 한 영국 노인이 퍼붓는 욕설을 들었다. ‘한국사람들이 이곳에 너무 많이 살기 때문에 영국인이 쫓겨난다’는 말이었다.
비록 일부 노인의 불만이지만 서로간의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는 다문화주의는 위험하다는 상식을 일깨워 주었다.

/anpy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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