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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에서]제약협회에 바란다/임호섭 산업2부 차장



허일섭 녹십자그룹 부회장이 지난 24일 한국제약협회 제6대 이사장에 선임됨으로써 무거운 짐을 지게 됐다.

국내 제약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그에게 주어진 책무가 결코 가볍지 않은 까닭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국내 제약산업은 의약분업 이후 시간이 갈수록 나락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외형은 성장하고 있지만 실속이 없고 외자 제약사들의 시장공략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분업을 계기로 처방약 비중이 높아지면서 대다수 외자사들은 매년 20% 이상의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말 현재 외자사들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40%대에 근접했다. 안방시장을 몽땅 외자사에 넘겨줄 날이 멀지 않았다는 우려가 결코 기우(杞憂)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문가들은 위기탈출의 근본대안은 신약개발이라고 역설한다.

신약개발의 원동력은 두말할 여지없이 연구개발(R&D)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에서 나온다. 투자 여력이 없다면 하다못해 영세기업간 제휴를 통해서라도 신약개발 역량을 모아야 한다. 이것도 어렵다면 기업간 인수합병(M&A)을 통해 R&D 능력을 보완하고 틈새시장형 개량신약 개발에 발벗고 나서야 한다.

불행한 것은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카피약 만들기에도 버거운 것이 국내 토종 제약기업들의 현주소다. 특허 만료된 한가지 성분의 카피 약물이 이름만 달리한 채 매년 수백종씩 쏟아지고 있다.

일례로 화이자사의 고혈압치료제 ‘노바스크(성분명 암로디핀)’ 복제약은 지난해말 현재 10종을 넘어섰고 사노피아벤티스사(한독약품)의 당뇨병치료제 ‘아마릴(성분명 글리메피리드)’ 복제약은 무려 80여종에 이른다.

기업별로 연간 20조원 이상을 R&D에 투자하고 있는 외자사들이 그 대가로 얻어낸 신약을 무기로 국경없는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을 때 토종 제약사들은 안방시장에서 ‘카피약 잔치’를 벌이고 있는 셈이다. 400개가 넘는 국내 제약사들이 10분의 1도 안되는 외자사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제약기업간 힘의 결집에 있다. 한계상황에 직면한 국내 제약산업의 성장 잠재력을 키우고 신약개발 능력을 보완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기업간 힘의 결집은 필요악이다. 일명 ‘뜨는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생명공학기술(BT) 분야의 60%가 의약분야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약산업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이는 기회있을 때마다 한국제약협회가 주창해 온 국가경쟁력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를테면 R&D 시너지 창출을 위한 기업간 컨소시엄구성이나 빅딜(사업교환), 신약개발에 대한 대국민 인식 제고 및 정부지원금 확대, R&D 투자 기업에 대한 금융 및 세제지원 확대, 브랜드 의약품 육성 및 중복투자 예방 등이 협회가 그간 주장해온 제약산업의 발전방안이었다.


문제는 M&A와 R&D 투자에 인색한 토종 기업들의 폐쇄적 경영방식과 자사 이기주의에 있다. 신임 허일섭 이사장의 책무가 무거운 것은 다름 아니다. 토종 기업간 장벽을 허물어 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단체가 한국제약협회이기 때문이다.

/ ekg21@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