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월드리포트

[월드리포트]EU헌법에 반대한 프랑스/안정현 파리 특파원

김성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06.09 13:07

수정 2014.11.07 17:46



지난달 29일 프랑스인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헌법 안을 부결시켰다. 프랑스가 독일과 더불어 유럽 통합 과정을 주도해 온 국가라는 점에서 그 파장은 적지 않을 전망이다.

이미 예정된 일이긴 했으나 사흘 뒤 실시된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도 유럽헌법은 부결됐다. 독일, 프랑스, 그리고 현 유럽연합(EU) 의장국인 룩셈부르크 정상들이 부결 후폭풍을 막기 위해 애썼으나 영국은 국민투표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이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달 중순에 있을 유럽 정상회의에서 대책이 논의될 예정이지만 돌파구 마련이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EU 형성을 앞장서서 이끈 프랑스가 이번엔 스스로 그 앞길을 가로막음으로써 그에 대한 역사적 책임 또한 무겁게 됐다.
벌써부터 일부 국가에서는 국가 이기주의의 발로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번 국민투표에는 복잡한 배경이 있다.

수치상으로 보면 근소한 표 차로 찬반이 갈릴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을 뒤엎고 반대가 찬성을 5% 가까이 앞질렀다. 투표 불참률 또한 지난 1970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인 30.26%에 머물러 이번 결과는 부정하기 어려운 민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반대표 속에 든 내용이다. 첫째, 유럽통합의 최대 상징인 단일 통화(유로) 출범 이후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지난 90년 이래 가장 높은 실업률 등 불황에 허덕이는 프랑스 경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으로 꼽힌다. 통합 이후 동유럽 등 역내 저임 지역으로 공장이 속속 옮겨가면서 일자리가 준 것이 프랑스인들에게 EU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경제통계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공장 이전으로 프랑스에서 2%의 일자리가 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현 집권 여당은 어떤 처방도 내놓지 못했다. 집권당은 이미 지난 2002년 대선 이후 치러진 지방선거와 유럽의회 선거 등 각종 선거에서 참패했으나 변화의 노력을 보이지 못했다. 이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럽헌법이 프랑스의 실업을 더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대답이 46%(복수응답 가능),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40%를 차지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자국민 우선 보호 논리를 앞세운 극우파와 국수주의자들의 주장은 많은 유권자의 공감을 얻었다. 이들은 동유럽 국가 등에서 대량 유입된 값싼 노동력이 프랑스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극우파와 국수주의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유럽통합과 관련된 주요 현안이 있을 때 늘 있어 왔다. 오히려 이번 투표에서 반대표가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많은 중도좌파 성향의 유권자들이 등을 돌린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제1야당인 사회당의 경우 논쟁 끝에 찬성을 당론으로 정했으나 지지자 중 59%가 반대표를 던졌다. 당론을 정하지 못한 녹색당은 지지자들의 64%가 반대표를 행사했다.

이들의 논리는 단순한 EU 반대가 아니라 또 다른 EU에 대한 요구였다. 현재의 유럽 헌법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유럽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이다.

EU 회원국 확대 이후 산업시설 유치를 위해 국가별로 세금을 깎아주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이는 조세 덤핑을 부추겨 복지예산을 갉아먹고 결국 유럽사회의 하향 평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게 이들의 걱정이다. 이 같은 악순환을 막으려면 회원국 사이의 조세 수준 합의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조세에 관한 결정은 여전히 회원국 만장일치 사항으로 둠으로써 합의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EU를 단순한 자유무역지대로 활용하려는 영국 등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들이 반대한 이유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투표 이후 회원국들의 반응을 보면 EU 건설이라는 큰 목표에는 아직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번 프랑스 국민투표가 보여주듯 어떤 유럽을 선택할 것인가다.
과연 프랑스 유권자들의 생각대로 이번 국민투표의 부결이 조금 돌아가더라도 사회민주주의적인 유럽을 향한 새로운 계기로 작용할지, 아니면 단지 유럽통합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 junghyun@fnnews.com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