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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백시종 “문학세상에 보내주신 어버이 넉넉했던 제자사랑 그립습니다”



그리운 선생님

선생님을 떠나 보낸지 10년째 되는 싱그럽고 영롱한 6월 입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맨 먼저 그 넉넉했던 제자 사랑이 떠오릅니다. 저희들에게 있어서 선생님은 흡사 6월 달 식물에 흠뻑 쏟아주는 햇빛 같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선생님 이름으로 심고, 물주고 거름 주던 제자들이 어느새 거목으로 자랐습니다. 이제 그 면면을 들먹이지 않고서는 한국문단을 논할 수 없을 위치에 까지 왔으니까요.

저 역시 그 일원 중의 한 명으로 끼였다는 사실이 그토록 자랑스러울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필명을 지어 주셨을 때가 1965년이었던가요? 꼭 40년 전 일입니다. 그때 저는 선생님의 본명이 ‘始字 鍾字’인줄도 몰랐습니다. 그만큼 저는 무식했습니다. 그러 길래 시쳇말로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별 못하고 주시는 대로 덥썩 받아 어쭙잖은 문인 행세를 40년간을 이어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한때는 ‘김동리의 본명을 이어 받은 행운의 작가’라고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잘 다듬으면 물건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선생님의 믿음을 저 만큼 하루 아침에 배신한 제자도 없습니다.

원래 타고난 재능이 그 뿐 인데다가 7남매 장남이라는 어려운 집안 사정을 핑계 삼아 순수문학지가 아닌 대중 신문잡지에 함부로 써 갈기는 일을 밥 먹듯 했으니 선생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깝고 한심하셨겠습니까. 어쩌면 그런 부끄러운 행적 때문에 선생님 앞에 우뚝 서지 못하고, 늘 주변만 빙빙 돌았는지도 모릅니다.

내일 17일이 선생님의 기일입니다. 우리는 10주기를 맞아 몇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한 가지가 기라성 같은 선생님의 제자들이 빠짐없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입니다. 물론 선생님이 이 땅에 일궈놓고 가신 문학적 업적 뿐 아니라 그 넉넉한 인간적 면모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는 그야말로 우리 한국문학의 정통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데 선생님의 첫 번째 제자인 박경리 선생이 피치 못할 선약 때문에 불참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암담했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첫 번째 공식 모임에 당신의 큰 제자를 모시지 못한다면, 그것도 미리 연락을 드려 스케줄을 조정하지 못한 실무진의 게으름 때문에 생긴 실수라면 어찌 동리 문학 정신의 진수를 말 하는 자리가 될 수 있으며, 추모 운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 길로 원주 토지문학관을 찾았습니다. 그날따라 흰 찔래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흰 찔래꽃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박경리 선생은 우리의 방문을 받자마자 중요한 선약을 취소하고, 17일 행사의 참석을 약속했습니다. 약속만이 아닙니다. 박경리 선생은 다음과 같이 증언도 해 주었습니다.

“김동리 선생님은 나를, 내 문학을 세상에 보내주신 어버이시다. 선생님이 아니 계셨더라면 박경리라는 작가도 작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만 생각하면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다. 제자로서 보답한 것이 터럭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옷 한 벌 지어드린 일이 없고 밥 한 끼 대접 한 일도 없으니 말이다. 선생님은 오늘 활동하고 있는 과반의 작가를 길러 내셨고, 현대문학의 지평을 그으신 분이다. 참으로 위대한 작가, 위대한 스승이셨던 선생님, 배은망덕한 이 제자 저승에 가게 되면 그때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려 주십시오.”

박경리 선생 뿐 아닙니다. 선생님 제자중의 한 분인 최일남 작가도 지난 5월 23일 서울 갤러리에서 열린 선생님 유묵전 개막식에서 “나를 이 나이 되도록 편하게 밥 먹고 살게 해 주셨으니, 김동리 선생님 고맙습니다” 했고 오정희씨 역시 “점점 작고 메마르고 약삭빨라져가는 세상에서 진정 크고 넉넉하고 편안한 큰 사람이 그리워질 때, 조건도 단서도 없이 불쑥 찾아가 아무런 긴장도 허물도 없이 주시는 대로 술 마시고 취하고 토하고 홍어 찜 같은 것도 얻어 오며 치댈 수 있는 어른이, 우리 선생님이 안 계신다는 것이 이렇게 쓸쓸하고 허전하고 슬프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문학사에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이 그렇습니다. 오는 9월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예정된 10주기 기념 심포지엄에서 주제 발표를 맡은 김윤식 교수는 선생님 작품에 대해 “김동리는 당초부터 대가로 출발, 대가로 일관했다. 발상의 독창성에서 그러하며, 착상의 패기에서 그러하며 구성의 완벽성에서 그러하다. 김동리 문학을 두고 고전적 성격이라 규정할 경우, 위의 사실들이 그 근거가 될 것인 바, 규정적 삶의 형식 탐구가 그 해답이다”고 말한 김교수는 ‘작가 김동리 문학이야말로 헤겔의 정신 현상학이 보여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드라마를 뛰어 넘은 경지’라고 결론 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형벌처럼 주어진 ‘문학의 죽음’을 부활시키는 방도가 있다면 40년 전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며 성장했던 저희들처럼 ‘역마’ ‘무녀도’ ‘황토기’ ‘밀다원 시대’ 등을 다시 찾아 읽는 새로운 독서운동이 불길 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제1회 김동리 작품 독후감 공모 대회를 전국 규모로 열고 있습니다만, 아무쪼록 많은 청소년들이 선생님 작품을 접하고 새로운 영안에 눈 떠지기를, 그리하여 우리 문학의 중흥시대가 다시 꽃 피우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손꼽아 기대해 봅니다.

끝으로 선생님, 10주기를 맞아 선생님의 고향인 경주에서도 선생님 문학 기념관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당초 스캐줄 대로라면 9월쯤 준공식을 끝내고 11월 초순에 개관할 계획이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내년 봄으로 미뤄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경주 불국사 경내에 들어설 문학관이 완공되면 여기저기 흩어졌거나 창고 속에 잠자던 선생님 관련 자료들이 세상에 나와 경주에만 가면 쉽게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리라 사료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경주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이사장을 여러 차례 역임한 한국 문인 협회에서도, 한국문학, 월간문학을 창간했던 청진동에도, 미아리에도, 신당동에도, 청담동에도, 명수대에도, 아니, 우리나라 어디에도 선생님은 살아서 흡사 6월 햇빛인양 모든 식물에 영양분을 고루 고루 공급하듯 우리 7000명 문인들의 건필을 빌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선생님 그럼 17일 행사에 나오셔서 ‘아, 너희들 왔구나 고맙다’며 어깨 두들겨 주시리라 믿으며 이만 줄입니다.

/백시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