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 말리는 전쟁입니다. ‘돈’ 있는 기업들이야 버티면 그만이겠지만 우리 같은 회계법인은 소송 한 건에 밥줄이 끊깁니다.”
대형 회계법인 임원인 공인회계사 A씨의 푸념이다. 12월 결산법인의 회계감사 마감을 1개월 앞두고 공휴일은 물론 매일 밤 12시가 넘도록 야근에 쫓긴지 꼬박 두 달째. 회계법인에는 ‘파트너-디렉터-매니저-시니어-주니어’라는 서열이 존재하지만 근무 강도는 서열이 따로 없다.
‘분식회계’ 고해성사 만료 시점이 오는 3월 말로 다가오면서 요즘 감사 현장은 전쟁터와 다름없다. 회계사들은 ‘과거 분식 찾기’에 눈을 부릅뜨며 설득도 마다하지 않고 있지만 기업들은 ‘유리알 경영’ 요구에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소송당한다’ 깐깐해진 외부감사
“털어서 먼지 안나는 기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투명한 것도 좋지만 과다한 요구에 업무가 마비될 정도입니다.” 상장 제조업체 A사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칠 사안인데도 따지고 드니 난감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편으론 이해가 가지만 ‘내부회계관리제도’까지 도입했는데 회계감사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상장 업체인 B사 재무팀 관계자의 설명이다.
왜 이렇게 회계법인들의 요구가 깐깐해진 것일까.
과거 분식회계에 대한 고해성사 기간이 3월 말로 끝난다. 이 기간이 지나 분식사실이 드러나면 관련 기업은 물론 회계법인까지 집단소송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분식회계로 파산한 엔론의 회계감사를 담당했던 아서 앤더슨 등이 당시 증권집단소송으로 부담한 금액은 72억달러, 약 6조7000억원에 달한다.
이에 따라 회계법인의 고민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회계법인 근무경력 7년차인 한 매니저는 “감사 기업에 혹시 (과거 분식사실이) 있으면 밝히라는 설득에도 감사기간 잘못을 고백하는 기업은 한 곳도 없었다”면서 “수박 겉핥기식 감사를 했다간 자칫 책임을 모두 뒤집어 쓸 수밖에 없어 강도 높은 감사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분식회계를 자진 고백한 기업은 1705개 상장기업 중 고작 200여개에 불과하다. 감독당국과 관련 업계는 정확한 추정은 불가능하지만 최소 수십개 이상의 기업이 과거 분식을 떠안고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기업들도 “유리알 회계”구축에 앞장
하지만 회계감사와 관련, ‘대충 눈감고 넘어가는’식의 관행은 많이 개선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먼저 기업들이 투명경영에 나서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민영화한 포스코. 국내 최초의 전사적 통합경영시스템인 ‘포스피아’는 이 회사의 자랑거리다. 회사 관계자는 “관계사들의 자금 흐름까지 한눈에 볼 수 있어 회계업무의 효율은 물론 ‘유리알 회계’가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회계 투명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기업도 마찬가지.
삼성전자를 비롯해 국민은행 등 초대형 기업은 물론 신세계, 굿모닝신한증권 등 중견 기업들도 내부회계관리 제도와 전사적자원관리(ERP)의 구축을 통해 회계의 투명성을 높여가고 있다. 비상장사 가운데 내부회계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LG CNS도 외부회계 감사와 더불어 이중 감시 체제로 신뢰도가 높아졌다고 말한다.
현재 외부감사 대상법인은 1만5757개(12월 기준). 현행 규정상 ‘내부회계관리 제도’를 도입한 자산총액 500억원 이상인 기업은 3329곳(상장사 중 도입한 곳은 추정에서 제외). 따라서 나머지 78.87%(1만2428개)는 올해 안에 전부 도입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중기 “회계비용 부담 우려”
문제는 공짜 점심은 없다는 점. 회계 투명성 제고 노력에 비례, 기업들의 부담도 같이 늘어나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애로를 호소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실제 대한상공회의소가 30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회계 관련 비용부담이 평균 24.9%나 증가했고 45.0%가 내부회계 관리제도 이행에 곤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금융감독원은 중소기업용 모범규준 마련에 들어갔지만 급증하는 회계비용 부담을 잡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다 .
금감원 관계자는 “올 상반기를 목표로 ‘중소기업을 위한 내부회계관리 모범 규준’을 마련하고 있다”며 “불필요한 부문은 완화하고 경영자 평가 등 위험이 높은 부문은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부분 기업의 결산기가 12월 말로 몰려 결산외부 감사의 과중한 업무 부담도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12월 결산에 90% 이상의 법인이 몰려 있다. 회계 업계에서는 기업들의 결산기를 분산하기 위해 이들 기업에 세금 혜택을 주거나 금리를 차별화해 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 산업 특성을 반영한 결산 조정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예들 들어 유통업종은 가장 바쁜 ‘설’을 피해 3월이나 6월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
딜로이드 안진회계법인 이재일 전무는 “90% 이상의 기업이 12월에 결산이 집중되면서 감사의 질적 수준도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kmh@fnnews.com 김문호 이세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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