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인터넷 뱅킹,안녕하십니까?/곽인찬 논설위원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06.23 17:03

수정 2009.06.23 17:03



얼마 전 단골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인터넷 뱅킹으로 값을 치렀는데 주인한테 전화가 왔다. 6만원이 아니라 60만원이 잘못 입금됐으니 차액을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늘 걱정하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군. 단골이라 주인을 잘 아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나자빠지면 어쩔 뻔 했나.

6만원에는 0이 4개, 60만원엔 5개가 붙는다. 여차하면 금액을 잘못 적어놓고 엔터 키를 칠 수도 있다. 이 정도는 약과다.
백만·천만원 단위 거래를 할 때는 온 몸에 신경이 곤두선다. 얄궂은 인터넷 뱅킹은 세자리 단위로 끊어주는 콤마(,)조차 없다. 모든 책임을 내가 걸머지고 두번, 세번 동그라미를 세어본 다음 엔터를 치고 확인 단계에서 또 세어본다. 거래가 정상으로 끝났다는 표시가 뜨면 또 한 번 잔액을 확인한다. 별 이상이 없으면 그제서야 한숨을 돌린다.

어제부터 신사임당의 얼굴이 그려진 5만원 권이 나왔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이렇게 통 큰 화폐액면단위를 쓰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헝가리에 2만 포린트짜리 지폐가 있다지만 가볍게 눌렀다. 화폐단위만 놓고 보면 한국은 후진국이다. 유로는 달러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고 위안은 달러당 7위안 안팎이다. 달러당 100엔 수준의 일본 엔화가 그나마 위안이지만 1300원과는 무시할 수 없는 격차가 있다.

화폐액면단위변경(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박승 총재 시절 한국은행은 리디노미네이션을 5만·10만원짜리 고액권 발행과 동시에 추진하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래야 기기의 중복 교체 등에서 오는 불필요한 비용과 혼란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액면단위를 바꿀 경우 물가불안이 우려되며 회계·컴퓨터 시스템 등을 바꿔야 하는 등 사회·경제적 파급 효과가 크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이성태 총재 역시 당분간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혀놓고 있다.

물가불안 우려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있다. 요즘 택시를 타거나 괜찮은 점심을 먹으려면 1만원을 훌쩍 넘긴다. 대형 뮤지컬은 10만원을 호가하고 대학 등록금은 수백만원이다. 평범하게 결혼해도 수천만원이 든다. 소형 아파트 한 채에 억 소리가 나고 노후자금은 최소 수 억원은 있어야 한단다. 새로 5만원짜리가 나왔으니 허세·과시용 소비가 더 판을 치게 생겼다. 앞으로 경조사비는 최소 5만원, 신경 좀 쓰면 10만원으로 굳어지지 않을까. 초인플레이션을 겪는 저개발 후진국도 아닌데 과연 이게 정상인가.

회계·컴퓨터 시스템 수정도 크게 염려할 것은 못 된다. 20세기 말 세계를 공포에 몰아놓었던 Y2K 재앙은 헛방으로 끝났다. 컴퓨터는 2000년을 1900년으로 인식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고 비행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국내 IT 기술이 리디노미네이션 하나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진 않다.

다른 거 다 접더라도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은 온라인 뱅킹을 할 때마다 아슬아슬 긴장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화폐단위를 1000대 1로 조정하면 지금 1000원이 1원이 된다. 이게 너무 과하면 100대 1 또는 10대 1은 어떤가. 적정 비율에 대해선 화폐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으면 될 것이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우리 국민의 추억은 그리 좋지 않다. 1962년 당시 군정은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을 겨냥해 10대 1의 비율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화폐의 호칭은 환에서 지금 우리가 쓰는 원으로 바뀌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흘렀다. 우리 경제는 몰라보게 커졌고 달라졌다.
그때와 같은 강압적인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검은 돈 색출이 아니라 좀 더 편한 일상을 위해 리디노미네이션 도입을 위한 토론의 문을 활짝 열어놓자.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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