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그래도 경쟁은 아름답다/곽인찬 논설실장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2.03.06 17:06

수정 2012.03.06 17:06

[곽인찬칼럼] 그래도 경쟁은 아름답다/곽인찬 논설실장

 스마트폰 앱 중에 트랭글이란 게 있다. 주말 산행 때 아주 요긴하다. GPS 즉 위성항법장치에 연결하면 산행시간·궤적·고도를 자동으로 기록한다. 자기 몸무게를 넣으면 소모 열량도 척척 계산한다. 그중에서도 최대 매력 포인트는 랭킹이다. 각자 산행기록을 업로드하면 점수를 매겨 순위가 발표된다.


 랭킹은 승부욕을 자극한다. 현재 내 순위는 100위권 밖에 살짝 걸쳐 있다. 지난겨울 지리산·소백산에 다녀온 뒤 순위가 쑥 올랐지만 100위권 이내 '산행 고수'들에 비하면 갈 길이 멀다. 10위 안 '산중지존'들은 나 같은 '평민산꾼'의 눈엔 경외의 대상이다.

 트랭글은 새삼 나에게 자본주의의 저력을 일깨운다. 지금 나는 100위 안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집사람은 그런 내가 신기한 모양이다. 왜 그렇게 순위에 목숨을 거느냐며 자못 힐난조다. 나도 잘 모르겠다. 예전엔 벗들과 어울려 산을 찾는 걸로 만족했다. 그런데 GPS 앱을 만난 뒤론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싶다. 랭킹은 내 안에 똬리를 튼 경쟁본능을 자극했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경쟁을 먹고 산다.

 미국 격주간 포브스지가 발표하는 기업 순위는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끈다. 삼성전자·현대차가 일본 기업을 제치면 은근히 기쁘고 중국 기업들이 바싹 쫓아오면 괜히 마음이 급하다. 워런 버핏(버크셔 해서웨이)과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간에 벌어지는 세계 1위 부자 쟁탈전도 흥미를 자아낸다. 우수 대학·병원 순위 평가에선 주간 US뉴스 앤 월드 리포트가 관록을 자랑한다.

 주말 연예의 최강자로 등극한 '개그 콘서트'는 내부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하다. 지난주 일요일에 개콘 제작현장을 들여다본 '다큐 3일'이 방영됐다. 개그맨·개그우먼들이 빵 터지는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머리를 쥐어짜는 모습은 너무나 진지했다. 방청객 앞에서 녹화를 마쳤다고 끝이 아니다. 몇몇 코너는 끝내 TV 전파를 타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한 개그맨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선 무대에서 웃기는 사람이 최고다." 이런 선의의 경쟁이 개콘 전성시대를 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범람은 경쟁과 순위에 묘미가 있다. 'K팝스타'(SBS)에선 10대 소녀 이하이와 박지민의 불꽃 튀는 경쟁이 한창이다. 1등에겐 그야말로 꿈 같은 혜택이 주어진다. 참가자들은 그 꿈을 찾아 제 능력을 극대화한다. 오디션은 오로지 실력만으로 승부한다. 부모가 누군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뚱뚱한지 홀쭉한지, 키가 큰지 작은지, 한국사람인지 아닌지는 부차적이다. 이런 무차별적인 공정성이 시청자들을 열광케 한다.

 이처럼 경쟁은 좋은 것이다. 발전의 원동력이다. 평등에 집착한 사회주의자들은 경쟁을 억눌렀다. 그러나 본능을 거스른 실험은 실패했고 결국 종주국 러시아마저 사회주의를 버렸다. 중국식 사회주의는 무늬만 사회주의다. 도농 간 불평등은 중국 공산당이 풀어야 할 최대 과제로 부상했다. 교조적 사회주의를 고집하면 북한처럼 된다. 배가 고파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는 나라가 불행히도 우리와 피를 나눈 북한이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진보좌파의 목소리가 커졌다. 시장에 대한 회의도 커졌다. 정부는 틈만 나면 호루라기를 불어댄다. 정치인들은 자기야말로 서민·중소기업 편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대기업들은 자라처럼 목을 옴츠리고 있다. '시장 때리기'는 당분간 이어질 듯하다.

 시장의 부작용만 손질하면 되는데 어쩌다 보니 아예 시장이 천하의 불한당인 양 뭇매를 맞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시장의 역기능을 그냥 두자는 게 아니다. 다만 소의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을 저질러선 안 된다는 얘기다.

 한국 자본주의는 천민 자본주의란 비아냥을 듣는다.
뿌리가 얕아 품격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손가락질 받는 재벌들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공정성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경제개발 반세기 만에 강소국 반열에 오른 데는 무엇보다 시장의 역할이 컸다. 빈대 잡으려고 시장을 태울 수야 없지 않은가.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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