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경제 양성화는 새 정부의 가장 강력하고 야심찬 캐치프레이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증세 없이 135조원의 복지재원을 마련한다는 목표아래 지하경제 양성화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과거에도 정부는 지하경제와의 일전을 치른 적이 있다. 지난 1993년 금융실명제법 실시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후에도 부동산실명제, 신용카드 사용 확대, 현금영수증 제도 도입 등의 노력은 꾸준히 병행돼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전히 우리 경제에서 약 5분의 1은 정부의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정확한 수치는 나오고 있지 않지만 새누리당에선 국내총생산(GDP)의 24~29%를 지하경제로 보고 있으며, 민간·국책 연구기관과 경제학자들은 대략 17~25% 선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파이낸셜뉴스는 지난달 21일부터 '근혜노믹스 복지재원, 지하경제 양성화로' 라는 시리즈를 통해 가짜 석유에서부터 불법 사금융, 인터넷 도박, 역외탈세 등 다양한 분야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총 10편에 이르는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지난달 31일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국내에서 손꼽히는 지하경제 전문가인 전태영 경상대 교수, 한국경제연구원 송원근 공공정책연구실장, 강병구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소장(인하대 교수), 김재진 조세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박훈 서울시립대 교수 등으로부터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쟁점과 과제에 대해 들어봤다.―지하경제 양성화는 과거 정부에서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풀지 못하는 숙제와 같다. 실패 이유는 무엇이며, 새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삼아야 할 원칙이 있다면.
▲전태영 교수=국민의 정책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국민들이 정책과 정부 당국자를 믿고 따를 수 있는 신뢰가 형성될 때 자발적인 지하경제의 양성화가 진행된다. 정부의 정책을 믿었는데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거나 행정부, 법원, 국회의 공직자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일반 서민들은 자신이 행하는 작은 지하경제를 정당화하게 될 것이다. 또 규제만으로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2004년부터 시행된 성매매특별법이 일례다. 이 법은 지하경제를 축소하고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제정됐지만 오히려 음성시장만 키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거슬러올라가자면 미국의 금주법을 들 수 있다. 윤리적인 문제와 경제 문제를 혼동하는 경우 지하경제 문제를 악화시키게 된다.
▲박훈 교수=조세정의 실현을 지속적인 과제로 인식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 일시적으로 세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언제든 소득과 소비, 재산 등에 맞춰 꼭 세부담을 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세금을 줄이려는 사람들, 불법적인 거래, 현금거래 이 세 가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하경제 양성화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조세정의를 세우는 차원에서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접근해야 할 문제이지 일거에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송원근 실장=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노력엔 세정 인프라를 개혁하는 작업도 필요하고 동시에 경제활동 위축을 방지하고, 국민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노력 역시 포함돼야 한다. 또 소득 파악이 어려운 자영업자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배 가까이 된다. 서비스산업 규제개선 등을 통한 자영업자의 비중을 축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강병구 교수=정경유착의 고리나 탈세 행위에 대한 약한 처벌로 인해 유인체계가 부족한 탓이다. 또 생계형 탈세를 방지하기 위해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사회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인수위와 새누리당은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연 6조원가량의 세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제시했다. 과연 현실성 있는 목표인가.
▲전 교수=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가 크기 때문에 6조원 정도는 쉽게 걷을 수 있다는 건 낙관적인 생각으로 비쳐진다. 6조원을 걷을려면 대략 50조~100조원 이상의 세원 발굴이 있어야 가능하다. 합리적이고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송 실장=정권 초기 지하경제 양성화 조치로 5조원가량의 세수 증대가 나타날 수 있으나 금융거래 위축 등으로 세수 증대가 지속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김재진 선임연구위원=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보다 1%가량 추가적으로 지하경제가 양성화된다고 가정할 경우 추가세수액은 약 6000억원이다. 6조원의 추가 세수를 발굴하려면 적어도 지하경제 양성화율이 10% 이상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더구나 단시간 내에 선진국 수준으로 축소한다는 건 쉽지 않다.
▲강 교수=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를 24%로 가정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고, 탈루소득을 제외한 지하경제 22조3000억원을 양성화하는 것 또한 쉽지는 않다. 노력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박 교수=지난 2011년 국세청이 개인사업자 세무조사로 7000억원 정도, 법인사업자 세무조사로 4조4000억원 정도, 부가가치세 세무조사로 5000억원 정도, 양도소득세 세무조사로 4000억원 등 6조원 정도 걷은 것과 비교해 보면 양성화에 따른 세수입액수는 그간 세무조사로 거둬들인 액수에 맞먹는 규모여서 세무조사 더해서 추가적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돈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국세청은 금융정보분석원 접근권을 확대하면 매년 6조원의 세금을 더 걷을 수 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연 8조원가량 세수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최근 금융정보분석원(FIU)의 고액현금거래보고(CTR)와 혐의거래정보(STR)에 대한 국세청의 접근권 확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국세청은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금융위원회에선 개인정보훼손 등을 이유로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데.
▲박 교수=국세청의 정보접근권 확대에 대해선 찬성하는 입장이다. 다만 국세청 안팎에서 제도 오·남용에 대한 보완장치가 있어야 한다. 국세청이 획득한 정보를 과세목적 이외에 정치적 목적 등 다른 목적으로 쓰는지 등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정보 사용 기록을 전산으로 남기고 이를 자체 및 외부 감사를 받게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국세청의 FIU에 대한 정보접근권 확대가 국세청 기관 위상 제고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보를 잘못 활용했다가는 국세청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함께 갖도록 할 필요가 있다.
▲김 선임연구위원=미국·호주 등 선진국은 과세관청이 금융정보에 대한 접근 범위를 확대하고 있는 추세다. 미국은 고액현금거래보고(CTR)자료에 대해 자국 국세청이 직접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과세 당국의 무분별한 개인정보 열람에 따라 인권 및 사생활이 침해될 여지가 있어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행정적 보완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전 교수=금융정보분석원에서 고액현금거래를 일차적으로 걸러서 문제가 되는 현금거래를 골라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 제도의 실패를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정보분석원에서 기계적으로 기준액 이상의 거래를 (모두) 국세청으로 통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송 실장=국세청의 접근권 확대에 반대한다. 일시적으로 세수증대 효과가 있을 순 있으나 금융거래를 위축시켜 오히려 지하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또 금융정보분석원이 가진 현금거래정보를 공유하는 건 금융실명제의 비밀보장 원칙에도 위배되고 (국가에 의한) 국민의 사생활 침해가 도를 넘을 수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의 다른 수단으로는 자영업자들에 대한 간이과세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박 교수=간이과세제도는 영세사업자들에게 부담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필요한 측면은 있지만, 이 역시 과세의 예외로 두는 것이기 때문에 그 대상자의 범위를 축소하는 게 필요하다. 이 혜택을 누리기 위해 매출누락 등 탈세를 조장하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간이과세 정비는 많은 저항에 부딪힐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도 쉽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강 교수=국세청 통계연보를 보면 2011년 소득기준으로 간이사업자는 전체 부가가치세 신고인원의 32.9%에 달하지만 과세분 매출 과세표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더욱이 간이사업자의 95.4%는 부가가치세 납부의무 면제자다. 따라서 간이사업자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탈세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부가가치세 납부면제 과세표준을 높이고 간이과세제도를 폐지하면서 사업주의 성실기장을 유도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송 실장=간이과세제도는 지난 17년간 유지된 만큼 간이과세자 기준(연 매출 4800만원)이 상향 조정될 필요가 있다. 또 자영업자의 세원 노출과 세수 증대를 위해선 직접세보다 간접세가 인상돼야 한다. 아울러 금융실명제법상 차명거래 관련 규정을 개정해 처벌조항 신설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김 선임연구위원=제도 정비가 필요하다. 간이과세자는 세금계산서를 발급할 수 없어 거래흐름을 단절시키고, 무자료거래 및 위장세금계산서 거래 등을 조장한다.
―1993년 금융실명제법상 차명거래 허용은 제도의 한계라는 지적이 있다.
▲강 교수=차명계좌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금융실명제법을 개정해야 한다. 현행 금융실명제법에선 차명계좌를 만든 사람이나 명의를 빌려준 사람은 처벌하지 않기 때문에 차명계좌는 여전히 고액자산가와 기업의 비자금 조성, 불법상속, 불법로비, 주가조작 등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는 부동산을 명의신탁한 경우에 신탁자와 수탁자를 모두 처벌하는 부동산실명제에 비추어 공평하지 않다.
▲김 선임연구위원=역시 법개정을 통해 차명거래에 대한 강력한 제재수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박 교수=부동산실명제와 같이 예금도 그렇게 하자는 논의가 있는데, 그 정도까지의 조치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차명계좌를 만들거나 만들어주는 사람에게 과태료 등 제재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지하경제로 꼽히는 불법 사금융, 가짜석유, 마약 중에서 새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우선순위에 놓고 집중적으로 주력해야 할 부분은.
▲전 교수=고소득 자영업자의 탈세행위를 우선 잡아야 한다. 변호사들의 수임료에 대한 과세는 대표적으로 과제가 현실화되지 않는 분야다. 이 부분은 법원이 변호사별 사건수임명세를 국세청에 통보하면 완화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어떤 이유인지 협조가 잘 되지 않고 있다.
▲강 교수=역시 고소득 자영업자와 법인사업자에 대한 세무조사를 강화해야 한다. 지난 2011년 세무조사대상 개인사업자와 법인사업자의 소득탈루율은 각각 36.9%와 9.5%로 나타났다. 그러나 세무조사비율은 개인사업자가 0.1%, 법인사업자가 1%로 낮은 상황이다. 일본의 경우 개인사업자와 법인사업자에 대한 세무조사비율(2005년 기준)은 각각 0.23%와 4.94%다.
▲박 교수=불법 사금융 분야를 지목할 수 있다. 지하경제는 불법적인 것과 연계돼 있는 경우가 많다. 불법 사금융은 이 불법적인 돈이 거래되는 온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송 실장=마약 등 범죄와 관련된 부분을 양성화하는 걸 우선순위로 둬야 한다.
―지하경제 양성화와 관련된 별도의 조직을 설치하거나 법률적·제도적 보완책이 있나.
▲강 교수=국세청의 조직체계를 개편해 지하경제 전담반을 구성하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핀란드의 경우 국세청 산하에 '지하경제조사국'을 설치하고 상당한 독립성을 부여해 지하경제활동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김 선임연구위원=별도의 전문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광범위한 지하경제를 파악하기 위해 전문인력 보완 및 정책의 지속성을 갖춰야 한다.
▲박 교수=지하경제 양성화가 세무조사 강화로 연결된다면 세무조사에 대한 견제장치도 함께 있어야 한다.
잘못된 세무조사에 대해서는 해당 세무공무원이 끝까지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뒤따라야 한다. 또 각종 비과세 및 감면을 줄이는 것도 지하경제 양성화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세금을 내지 않거나 줄여주는 것도 그 틈새에서 지하경제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정리=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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