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구순의 느린 걸음] 내년엔 나도 공룡을 키우고 싶다

이구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2.21 16:50

수정 2016.12.21 16:50

[이구순의 느린 걸음] 내년엔 나도 공룡을 키우고 싶다

"내년엔 어떤 분야에서 제일 큰 장이 설 것 같아요?"

"테레비요."

한 대기업 사장과 나눈 짧은 대화다. 짧지만 너무 명확한 대답에 둘러앉아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지금은 SK브로드밴드가 된 당시 하나로텔레콤의 최고재무담당자(CFO)가 공개적으로 한 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통신업체가 도전할 수 있는 새 먹거리는 미디어사업입니다. 기존에 투자해 둔 초고속인터넷 망에 부가가치를 더할 수 있는 것은 TV를 연계하는 것입니다.
"

그 이후 하나로텔레콤은 법에도 없던 인터넷TV(IPTV) 사업을 시작했다.

인공지능이니 자율주행차니 하는 미래사업 얘기가 뉴스에 가득하지만, 사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장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을 챙기는 게 제일 큰 숙제다. 미래사업도 좋지만 생일 하루 잘 먹자고 일주일을 굶을 수는 없는 일이니 당장 먹거리를 챙기는 게 최고다. 10년 전 그 CFO의 직감은 적중했지만 너무 빨랐다. 당시에는 IPTV가 미래사업이었다.

2017년을 열흘 남겨둔 지금 미디어사업은 당장 오늘 저녁 밥상이다. 더구나 통신사업이 내리막길로 접어든 지금 초고속인터넷뿐 아니라 이동통신에도 부가가치를 올리는 최선의 방법은 '테레비 사업'이 최고다.

사실 미디어사업이 당장의 먹거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세계 통신사업의 시초인 AT&T가 97조원이나 들여 타임워너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통신회사가 아니라 미디어회사가 되겠다는 업종 확장 선언인 셈이다.

국내 최대 통신회사인 KT도 미디어사업으로 수익구조를 옮겨가고 있다.

문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이다. 모든 기업이 차려진 저녁 밥상에 달려들고 있으니, 밥상을 차지할 힘이 없으면 저녁을 굶어야 한다.

요즘 IT기자들이 곧잘 쓰는 말 중 하나가 '미디어 공룡'이다. 미디어 시장에서는 덩치가 곧 힘이니 공룡들의 전쟁은 좋은 기사감이다. 그런데 넷플릭스, 유튜브, 아마존, AT&T…. 온통 외래종뿐이다. 토종은 없다.

그래서 올해 서글펐다. 거대 공룡들이 덤벼드는 저녁 밥상에서 아기공룡 '둘리'가 밥상을 차지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미디어사업을 하겠다는 기업들은 덩치를 키워 밥상을 차지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여러 '둘리'들이 덩치를 키울 수 있도록 정부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한국에서 미디어 공룡이 자라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정부 규제다. 그러니 규제부터 풀어줘야 한다.
덩치 키우겠다고 나서는 기업에 규제의 잣대부터 들이대 스스로 몸집을 줄이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한다.

2017년에는 나도 큰 공룡 한 마리 키우고 싶다.
내년엔 토종 공룡이 외래종 공룡들과 밥상을 놓고 막상막하로 경쟁하는 생생한 모습을 기사로 중계하는 신나는 상상이 현실이 됐으면 좋겠다.

cafe9@fnnews.com 이구순 정보미디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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